틀림없이 태어나기 전부터 약속했던거야
0.
태화당.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외곽에 기와로 지은 옛 모습을 그대로 남겨놓은 듯한 넓은 면적을 가진 건물이 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태화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이 건물은 보통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공부법을 배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역마를 불러내고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익히지 못하면 배우는 의미가 없어지기에 이 교육을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배우게 된다.
태화당은 일명 '법사'라고 칭해지는 이들을 키워내는 교육기관이었다.
그런 곳에 얼마 전, 신입생이 한 명 들어오게 됐는데 능력은 미숙하기 짝이 없지만 사역마를 부리는데에는 이미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특이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곧잘 아이들 사이에서도 걷돌며 조그만 시비에 툭하면 걸리곤 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가서 음료수 좀 뽑아 와!"
근처에서 자신을 향해 말해오는 소리에 주위를 슥 둘러본 소년이 아무 말 없이 심부름을 시킨 이에게 손을 내밀자 상대에게서 동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날아온 동전을 솜씨 좋게 잡아채고는 심부름을 하기 위해 걸음을 빨리 해서 태화당 안에 위치해 있는 자판기를 향해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는 심부름을 시킨 장본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보호받고 있는 주제에 아무것도 모른다니."
자신이 심부름을 시켜버린 소년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그에게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모여들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에 더더욱 인상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사와타리! 왜 매번 저 녀석에게 심부름 시키는 거야?"
"맞아. 아직 완벅히 적응 못 했을텐데."
그런 무지한 소리까지 듣게 된 상대방-이하 사와타리-는 순간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금 인상을 쓰며 심부름 시킨 소년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말했다. 어조는 한없이 비꼬는 어투였다.
"정말 미련스런 녀석이라 그런다."
게다가 뭐? 적응을 못 했어? 저 녀석이?
사와타리가 아는 한 퍼져있는 소문과는 정반대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그런 엉뚱한 말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그 출처부터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건 저 녀석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사와타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들이 그런 대화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자판기에 도착한 화제의 소년은 무슨 음료수를 뽑아다 줄까 하고 속편히 고민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우스꽝스러운 웃는 얼굴의 고양이 가면을 쓴 소년은 가면에 가려져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의 공기로 맹렬히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소년의 곁에 나타난 두 명의 존재는 그런 소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스터.)
"왜? [별읽기]."
전체적으로 하얗다고 할 수 있는 마술사의 부름에 평소때처럼 낮고 조용하게 답해주는 소년을 보던 그는 잠시 옆에 있는 검은색의 마술사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소년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리며 물어왔다.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찾으셨나요?)
"으음."
그 물음에 다른 의미로 고민하기 시작한 소년은 일단 자판기에서 눈에 띈 음료수 하나를 꾹 눌렀다. 심부름을 시킨 상대가 그 음료수를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소년이 신경쓸 부분은 아니었다. 철컹 소리와 함께 떨어진 음료수를 몸을 구부려 꺼내든 소년은 그 음료수를 보며 뒷말을 마저 이었다. 손 안에 전해지는 시원한 물기가 담긴 온도가 기분 좋았다.
"몰라. 아직은 찾고 있는 중, 이랄까."
소년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지 정면으로 쓰고 있던 고양이 가면을 오른쪽으로 돌려놓고 지금까지 마술사들이 봐온 그 어떤 미소보다도 환하게 웃어보이며 말을 마무리지었다. 태화당의 아이들은 소년이 이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재주 좋은 소년은 그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찾게 되면 무척 기쁠 것 같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 순간을 생각하는지 소년의 붉은 눈동자는 그 어떤 때보다 오랫동안 반짝거렸다. 기대감에 양 뺨도 발그레하게 되어서 소년을 생기있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던 두 마술사들도 코와 입을 가려버린 두건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듯하던 소년은 잊기 전에 음료수를 가져다주기로 하고 다시금 고양이 가면을 정면으로 돌려놓으며 얼굴을 가려버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년이 지나간 자리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잇는 바람이 머무르다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한편 태화당 건물 안쪽에 위치한 원장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업무용 책상 위에 놓여진 한 장의 종이를 의자에 앉아서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물은 태화당에서 법사들을 키우고 있는 장본인인 원장이었다. 뒤쪽에 있는 창에서 햇빛이 비치며 어두운 원장실 안을 밝혀 책상 위의 종이를 비췄다. 그 종이는 태화당에 재적중인 누군가의 프로필이었다.
"……."
그 프로필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원장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필 안에 있는 인물의 사진은 그저 카메라를 보고 있을 뿐이었는 듯 전체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사진 속에서 붉은빛이 반짝이는 착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원장실을 빠져나간 뒤 조용해진 원장실 안에서 프로필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사카키 유우야.
1.
"'태화당'에서는 뭐라고 했지?"
"내일 중으로 괜찮은 실력의 견습 법사 한 명을 보내주겠단 답변이었습니다."
"그래? 드디어…."
누구를 생각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자신의 상사를 보며 비서-이하 나카지마-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며칠 전 마을 축제로 인해 잠시 바람 쐬러 나갔을 때 누구를 본 것인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지만 보통보다 약간 텐션이 높다는 것을 그의 옆에 오랫동안 있었던 나카지마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그 최고치를 달린다는 것을.
상사의 행동으로 보건대 원인은 분명 법사와 연관되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평소 관심도 없던 태화당에 축제 날을 기점으로 부쩍 신경쓰는 게 늘었다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한 것이다. 이 사태가 나아지려면 적어도 내일까지는 참아야 했다.
한편 그런 나카지마의 고역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화당은 아침 댓바람부터 시끌벅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법사들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가지지 않던 이 시대 최고의 기업인 LEO코퍼레이션이 법사들을 지원해 준다는 걸로도 모자라 견습 법사 한 명을 전면적으로 밀어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태화당에서 선별한 인물이 어제 붉은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소년에게 심부름을 시킨 그 사와타리였다. 그 사실에 금새 자만에 빠져서는 어꺠 쫙 펴고 아침부터 힘주고 있는 중이었다.
지나가다가 그 사실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사와타리를 본 고양이 가면 소년은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아무 말 없이 그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 모습을 사와타리도 봤지만 이번엔 굳이 터치하지는 않았다. 사와타리를 지나쳐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곳으로 온 소년은 근처에 있던 작은 연못가에 가만히 서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상해….'
소년이 생각하기에 이번 LEO코퍼레이션의 행동은 무언가 이상했다. LEO코퍼레이션은 흔히 말하는 세계에 영향력이 막대한 대기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LEO코퍼레이션의 활동력에는 법사에 관한 사항은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생전 법사쪽으로는 관심도 주지 않았던 LEO코퍼레이션이 법사들을 지원해주면서 그 중 한 명을 전면적으로 밀어준다? 소년은 여기서 그 한 명에 초점을 맞췄다. 이 말은 LEO코퍼레이션에서는 이미 그 한 명을 누구로 할지 결정했다는 얘기 아닐까?
"에휴. 너무 나갔다, 너무 나갔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설레설레 내젓던 소년은 원장이 몰래 찾고 있다는 말을 [별읽기]에게 전해듣고는 아무도 모르게 원장실로 향했다. 똑똑, 두어번 노크하고 들어간 원장실에는 원장인 히이라기 슈조가 소파에 앉아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꾸벅 인사하고는 슈조의 건너편에 앉자마자 무게있는 분위기가 없어지고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원장실에 들어오기 전에 고양이 가면은 오른쪽으로 돌려놓은 소년이었다.
"유즈는 잘 지내요?"
"우리 유즈야 너무 잘 지내서 탈…이 아니잖니, 유우야?"
먼저 말을 꺼내든 것은 소년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넘어가려는 소년―사카키 유우야에게 그대로 넘어갈 뻔했던 슈조였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고는 되물었다. 그런 슈조를 보며 미소짓는 유우야였지만 그리 편해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그렇게 말하며 웃어보이는 유우야를 보던 슈조는 이유모를 울컥거림을 느껴야 했다. 오랜만이라는 유우야의 말에 따라 그들은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슈조의 딸인 유즈와 동갑이었던 유우야였던지라 둘이 함께 놀았던 적이 많았던 탓에 서로에게 그만큼 친숙했다. 그랬던만큼 유우야가 어느날 사라져버리자 유즈는 며칠을 울며 단식투쟁까지 불사질렀었다. 그러면서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유우야를 찾아오라는 협박 아닌 협박성 말들이었다.
며칠 전 유우야가 태화당에 들어오면서 슈조는 우우야를 프로필의 사진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슈조는 유우야와 얘기를 하려고 계획중에 있었다. 그런 슈조를 안다는 듯 유우야는 한결같이 미소짓고 있었다. 슈조는 그것이 웃는 얼굴의 가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거기에 대해서 굳이 물어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어디에서 뭘하고 지냈던 거냐?"
"그냥… 여행을 잠깐 다녔어요."
"태화당에 다닐 생각은 직접 내린거냐?"
슈조의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뒷말을 더 덧붙이려는지 유우야는 입을 열었다.
"왠지 여기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거든요."
"…무엇을?"
"글쎄요. 직접 보기 전까진 뭔지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며 모호한 의견을 내비치는 유우야였지만 그 뒷말은 슈조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유우야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 분명 그것일 것이다.
"유즈나 한 번 만나봐라."
"하하, 그래야죠. 맞지나 않으면 다행일지도요."
유즈의 얘기가 나오자 지금까지 짓고 있던 미소의 일부가 자연스레 바뀌었다. 몸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미소. 유우야 안에서의 유즈의 의미는 그런 것이겠지. 슈조는 그런 유우야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아. 근데 전 왜 찾으셨어요?"
"아아."
유우야의 그 물음에 그제야 부른 목적을 상기한 슈조는 자신도 유우야가 반갑긴 반가웠나보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슈조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유우야의 시선을 마주 바라봤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그 의문의 해결방법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눈 앞의 당사자일거라고 생각한 슈조는 탁자 위에 올려놓아져 있던 봉투 하나를 유우야에게 건네주었다. 봉투를 봐보라는 눈치였기에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든 유우야의 시선이 내용물에서 떨어지지 않고 고정되었다.
"이건…."
"이번에 LEO코퍼레이션 쪽에서 보내온 거다. 한 번 읽어봐라."
한참만에 나온 유우야의 말에 슈조는 그렇게 말했다. 유우야에게 건네진 봉투는 새벽 댓바람부터 LEO코퍼레이션으로부터 총알 배송으로 날아온 통칭 '법사 지원, 그 이하'였다. 하지만 유우야가 집중한 것은 그런 광범위한 부분이 아니라 LEO코퍼레이션에서 지원해준다는 그 한 명에 기재된 특징 부분이었다. 그건 한 눈에 보기에도 사와타리가 아닌 자신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여기에 적혀진 건 저에 대한…."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꿍꿍이…."
당황해하는 유우야에게 슈조는 꿍꿍이가 있다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꿍꿍이라고 해도 자신은 LEO코퍼레이션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부르려는 건지 고민하던 유우야는 문득 LEO코퍼레이션에 가는 것이 자신이 아닌 사와타리라는 것을 되새겼다. 거기서 뭔가가 떠오른 유우야는 알만하다는 심정으로 슈조를 바라봤고 그런 유우야를 보며 씩익 웃는 슈조였다.
"부탁한다, 유우야."
그런 슈조를 보며 평소보다 긴 한숨을 내쉬는 유우야였다. 이런 일 시키려고 몰래 부르려 한 것인가. 하지만 자신도 신경쓰이는 부분이었으니 겸사겸사라고 치기로 하는 유우야였다. 게다가 그 편이 마음이 더 편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유즈는 사와타리가 LEO코퍼레이션에 도착할 즈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번만은 유즈를 기분 전환용으로 만나기로 하는 유우야였다.
드디어 대망의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전날 슈조에게서 사와타리가 몇 시쯤 LEO코퍼레이션에 도착하는지 미리 알아둔 유우야는 그즈음 유즈를 만나러 갔다. 만약 자신이 안 가서 괜히 불똥이 튀면 어쩌냐는 물음에 슈조는 아무 걱정 말라고하며 유즈나 잘 만나고 오라는 말만 들은 유우야였다. 걱정되긴 했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생각한 유우야는 유즈가 보일 즈음 [별읽기]와 [시간읽기]를 LEO코퍼레이션으로 보내고 오랜만의 만남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즈!"
유즈와의 간만의 만남에 냅다 달려가서 유즈가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안아버리는 유우야였다. 유우야와 유즈가 간만에 만나고 있을 즈음해서 LEO코퍼레이션에 도착한 사와타리는 이유모를 당황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던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에 삐딱한 미소를 짓고있는 LEO코퍼레이션 사장―아카바 레이지는 현재 머릿속으로 이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해 평소와는 다른 목적으로 풀가동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무슨 이유가 있던간에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군. 분명 특징까지 써서 보내줬던 것 같은데."
잘못된 원인부터 따져보자고 생각하고는 잘못된 내용을 은근슬쩍 돌려서 말했다. 머리가 나쁘지 않다면 금방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답게 와야 하는 인물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리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까지 확인한 후 나카지마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당장 가서 뭘 하는지 조사해 오도록. 중요하다 싶은 말은 적어놓고."
이렇게 지시했을 때 유즈와 함께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유우야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가 곧 원상복귀 되어 미소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지명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애써 웃고는 있지만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느끼는 유우야를 재빨리 눈치채고 주의를 돌려주는 유즈 덕분에 해결 안 나는 일은 일단 뒷전으로 놔두고 유즈에게 집중하기로 하는 유우야였다.
"정말 오랜만이다. 몇 년만이지?"
"하하. 오래된 것 같지만 얼마 안 됐어. 한 일년 반만일걸?"
"…그것도 길거든?"
"아하하."
적당히 반응해주는 유우야였지만 기간을 실제로 따져보자면 이 년이었다. 이 년이지만 모두의 앞에서 모습을 감춘 건 일년 반이라는 뜻이었지만 굳이 유즈에게 그렇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만약 이 년이라고 하면 더 걱정하는 거야 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은 유즈에게 은근히 약했다. 미리미리 거짓을 섞지 않으면 진실 그대로를 말해버리는 것이다. 그 점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LEO코퍼레이션 쪽에 더 쓸데없는 말을 알려줄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컸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거야? 아빠 말로는 태화당에 다니고 있다며?"
"어?"
궁금해하긴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설마 직구로 물어봐올 줄은 미처 몰랐던 유우야는 순간 당황해서는 걷던 걸음도 멈추고 유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유우야는 고민했다. 유즈는 괜찮았지만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는 쪽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이유를 말해버리면 두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로 압축되어버린다. 그건 왠지 모르게 싫었다. 두 질문의 이유를 따로따로 나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유우야였다.
유우야가 유즈의 질문에 당황했을 즈음 생각을 끝마친 사와타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레이지였다. 얘기하면서 자신 대신 와야했을 인물이 유우야임을 알아차린 사와타리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갸웃했다. 그런 사와타리의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말해보라는 듯 손짓하는 레이지였다.
"유우야 녀석이라면 굳이 이런 방법이 아니어도 '충분히' 스스로도 법사가 될 수 있을텐데."
사와타리의 말이 전부 신경쓰이는 레이지였으나 특히 신경이 쓰이는 건 '충분히'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점이었다. 그냥 말해도 어휘는 이상하지 않을텐데 그 사이에 '충분히'라는 단어가 들어감으로써 뭔가 의미 있는 문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레이지는 거기에 초점을 맞췄다. 무언가 있다, 그렇게 직감했다.
"그 '충분히'라는 건?"
"아아. 유우야 녀석한테는 '운'이 있달까요. 외딴 곳에 떨어져도 죽진 않을거예요, 그 녀석."
레이지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눈치챈 사와타리였지만 그냥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정말 우연히 알게 된 것이었고 한가지 약속을 해서 말하고 다니기도 곤란했다. 그 한 번 이후로 다시 본 적은 없었지만 유우야를 볼 때면 그만한 존재감을 가진 녀석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속에서 열불이 나 심부름을 시키며 속을 달래고 있는 나날이었다. 하여튼 그건 그거고.
"흐음."
사와타리의 반응을 보아 헛다리를 짚은 건 아닌 모양인데 그게 뭔지 알려줄 마음은 없어보였다. 거기에 레이지는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했다. 자신은 알아야했다. 자신이 모르는 세월 동안의 유우야에게 있었던 일들을. 자신은 유우야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유우야는 자신을 기억해주고 있을까. 생각이 너무 길게 뻗어나갔다는 걸 눈치챈 레이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사와타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제안을 하기로 했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인물이 잘못되긴 했지만 이곳에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관심은 있는 거겠지?"
협상인가, 아니면 거래? 태도를 바꾼 레이지에 대한 첫 생각은 저것이었다. 티는 잘 나지 않지만 이런 분위기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일로 인해 체험해본 적이 많은 사와타리였다. 지금 상황에서 우위를 점한 건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LEO코퍼레이션의 젊은 사장은 유우야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 덕분일까. 유우야에 대한 어떤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이 상황에서 사이에 유우야가 낀 게 마음에 들지 않긴 해도 그 덕분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으니 피장파장으로 칠까.
"관심이야 많죠. 많기야 많은데, 그 전에 한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뭐지?"
"사카키, 유우야에게 신경쓰는 그거. 단순히 관심뿐입니까?"
이걸 묻고 싶었던 거로군. 떨떠름하게 내뱉어진 사와타리의 물음을 듣고 레이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와타리가 진짜로 묻고 싶어했던 질문. 처음부터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재밌다는 듯이 웃는 레이지였다. 무슨 이유였는지 엄청 서럽게 울던 꼬맹이를 달래줄 때 했던,
"관심도 일부 있는 게 맞지만, 정확한 이유는―약속, 때문일까."
아직도 귓가에 울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며 들려온다. 많이 쳐줘봐야 여섯, 일곱 살로 보이는 꼬마가 숨 넘어가라 울어제끼던 그 날. 쑥스러운 마음에 헛기침과 함께 말했던 '내가 네 편이 되어줄게'. 같은 남자아이에게 했던 말치곤 왠지 모르게 프로포즈 같이 들렸던 말이었지만 덕분에 유우야를 잊지 않게 해준 고마운 말이기도 했다.
"그냥 지켜봐주고 싶은 그런 관심이랄까. 본인은 전혀 기억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레이지를 보며 사와타리는 말을 잃어버렸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사와타리였지만 애써 벌어진 입은 그 어떤 소리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닫힐 뿐이었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유즈의 질문에 비밀이라고 답한 유우야는 그 이후로 유즈와 함께 놀러다녔고 저녁놀이 질 즈음 헤어지기 위해 걷고 있는데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유즈를 불러세우는 유우야였다.
"유즈."
"왜에?"
"아까 물었었던 질문 있잖아. 그…내가 비밀이라고 했던 그 질문. 제대로 답할까 해."
바뀐 유우야의 결심에 의외라는 눈빛을 하고 바라보는 유즈였다. 친한 이들은 알고 있다. 우유부단한 면이 두드러지지만 한 번 결정한 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은근히 고집이 센 게 유우야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유우야가 사라졌을 때도 그런 면이 두드러졌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유우야가 의견을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 유우야는 은근히 고집이 세서 의견을 바꾼 적이 없잖아?"
"그냥. 왠지 그러고 싶어졌어. 들을래?"
"응."
결심은 했지만 유우야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유즈였다. 어떻게 해야 유우야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유즈는 알고 있었다. 그런 유즈를 보고 있자니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던 돌아왔다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실은 그 두 질문, 답이 같았어. 물론 약간 다르지만 기본은 바뀌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말이야…."
이유를 말해주는 유우야였지만 그 방법은 귓속말이었다. 왜 귓속말로 하는지는 몰랐지만 이유를 들은 유즈는 그게 다냐는 눈빛을 유우야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유즈의 눈빛에 계면쩍게 웃어보이는 유우야였다.
"별 거 없지?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얘기를 끝으로 그럼 다음에 보자라며 저 멀리 가버리는 유우야를 보던 유즈는 유우야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웃어보였다.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미소가 걸린 것은 덤이었다.
유즈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던 유우야는 [별읽기]와 [시간읽기]를 통해 들은 얘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카바 레이지가 자신과 했던 약속이라는 건 그의 말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기억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자세한 설명을 빼놓고 그냥 약속이라고만 하면 누가 아냔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유우야의 내면에서는 약속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유우야와 유즈가 헤어진 시각, LEO코퍼레이션에서 만났던 두 사람도 헤어졌다.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어낸 사와타리였지만 그 전제들에 전부 유우야가 어떤 형식으로든 얽힌 것에 은근히 기분이 얹짢은 사와타리였다. 순간적으로 아카바 레이지에게서 느껴졌던 느낌은 명백히 유우야를 향한 애정이었다. 아직까진 애정이라고 보기 조금 무리인 감이 있었지만 그걸 어렴풋이 깨달은 순간 말할 것도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그건 질투였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LEO코퍼레이션을 빠져나가는 사와타리를 내려다보던 레이지는 비서인 나카지마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보고 있었다. 유우야의 이동경로가 간단히 요약되어 있었고 특이상항으로는 일년 반동안 이곳을 떠나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점에 신경쓰인다는 듯이 미간을 구기는 레이지였다.
"일년 반? 그 기간 동안 이곳에 없었다고?"
"네. 그런 말이 오갔습니다."
"유우야가 누군가랑 만나고 있었나?"
"누군가 알아본 결과 히이라기 유즈라는 소녀로 태화당 원장의 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같이 놀던 소꿉친구라는 것 같습니다."
"간만에 만난 소꿉친구와 시간을 보냈다는 건가."
일년 반만에 고향에 돌아와 오랜만에 소꿉친구와 놀았다 정도로 납득한 레이지는 거기에 대해선 우선 신경을 끄고는 다른 곳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그 일년 반동안 어디에서 뭘하고 지냈고 무슨 이유로 돌아왔다고 하지?"
그 물음에 난처한 기색을 내비치는 비서를 보며 뭔가 틀어졌다고 예감한 레이지였다. 말해나 보라는 식으로 바라봐주자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애써 말하는 나카지마였다.
"거기에 대해선 듣지 못했습니다. 처음 그 질문이 나왔을 땐 비밀이라며 말하지 않다가 헤어질 때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유를 말했습니다만, 직접 말한 게 아니라 귓속말로 한지라 그 내용까지는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귓속말이라…."
만약 유우야가 사와타리가 LEO코퍼레이션에 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의문이 문득 레이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니 그 전에 유우야가 소꿉친구라는 여자애와 만나기 전 그 아버지라는 사람을 먼저 만났다면 어땠을까. 태화당의 원장과 그 학생이라는 연결점이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한번쯤은 만나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레이지는 미소지었다. 조금이지만 한 방 먹었달까.
"후- 그럼 가볼까."
되갚아주러 가야겠지?
그 즈음 발걸음을 집으로 갈 것을 태화당으로 돌려 슈조와 만난 유우야는 LEO코퍼레이션으로 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별읽기]와 [시간읽기]가 듣고 전해준 이야기를 다시금 이야기하는 유우야나 듣는 슈조의 표정이나 그다지 좋다고 보기 힘들었다. 슈조는 어떤 의미에서는 충격받아서이고 유우야는 다시금 떠올린 레이지의 영문 모를 소리들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파도처럼 되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얘기가 끝나자 원장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어떻게 생각하니?"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답이 없네요."
한숨과 함께 되돌아온 답변에 슈조도 똑같이 느꼈다. 묘하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도 일부 휘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난 결사반대다, 유우야. 한 번 잘못 걸리면 악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야."
"으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라고 애써 마주 대답해주지 못한 이유는 왠지 모르게 긍정했다가 슈조의 말대로 됐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은근히 식은땀을 흘리며 웃어보이던 유우야는 슬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기분에 휩싸여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집에 가면 자는 것도 내팽개치고 줄곧 고민하게 될 것 같았지만 말이다.
태화당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비싸다는 걸 알 수 있는 밴 한 대가 옆을 지나쳐갔다. 잠깐 그쪽으로 시선을 주던 유우야는 이내 제 갈 길을 마저 가기 시작했다. 그 스쳐지나감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올진 유우야조차도 알지 못했다.
태화당으로 향하던 중 집에 가는 듯한 유우야와 지나치게 된 레이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유우야는 차 안을 볼 수 없었지만 레이지는 유우야를 볼 수 있었다. 오늘은 고양이 가면을 쓴 기색이 보이지 않아 그 모습 또한 익숙하면서 새로워보였다.
똑똑. 유우야가 집에 갔기 때문에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다고 판단하고 집에 갈 준비를 하던 슈조는 찾아온 사람이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한마디 해줄 생각으로 상대를 바라봤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상대는 다름아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우야와 함께 화제에 올렸던 LEO코퍼레이션의 젊은 사장―아카바 레이지였다.
"큼,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다가 우리가 명시했던 아이와 만났는데 오늘 오지 않고 다른 인물이 왔더군요."
쓰고 있던 안경을 쓰윽 올리며 눈을 빛내는 레이지를 보며 슈조는 생각을 회전시켰다. 유우야를 만났다고? 이야기했나 라고 생각한 슈조였지만 그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유우야의 성격을 알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에 상대가 눈치챘음을 알아챈 슈조였지만 이쪽은 이 순간을 대비한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절반은 도박성이었지만 말이다.
"답신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내일, 그러니까 오늘 괜찮은 실력의 견습 법사 한 명을 보내준다는 거였습니다만 기억하십니까?"
"음."
분명 어제 나카지마가 말해준 내용이었고 꼼수를 부린 것 같지는 않은 내용이었기에 그대로 전해들은 기억이 있는 레이지는 가볍게 긍정했다. 그것을 보고 기회라고 생각한 슈조는 이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런데 어제 그런 봉투가 오고 전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이미 사와타리 군으로 확정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전체적인 내용을 확인했던 탓에 이미 결정해버린 것을 무를 수는 없잖습니까? 한껏 기대중인 그 기대감을 꺾을 수는 없었지요."
슈조가 말하는 것을 듣던 레이지는 미소지었다. 이거야 완전 능구렁이로군. 자칫하다간 자신이 말려들 가능성이 있어 타개책을 생각하는 레이지였지만 이 상황 자체가 그렇게까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상황수습에는 힘을 써줬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왜 그렇게까지 유우야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슈조의 그 말에 레이지는 나름 흥미를 내비쳤다. 아까 전의 사와타리도 그렇고 지금 눈앞의 사람도 그렇고 그 이유가 왜 궁금한 것인지 레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난 그 누구에게도 이해해달라 말한 기억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 대답을 듣던 슈조는 왜 세간에서 아카바 레이지를 말할 때 철옹성이라고 말하는지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았다. 따지는 쪽이 아닌데도 빈틈이 전혀 없었다. 수긍할 건 수긍하지만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면은 유우야와는 정반대였다. 그런 면이 슈조에게 믿음을 주었다. 인정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감정이지만 막연히 아카바 레이지라면 괜찮을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상처가 많아 옆에서 귀찮더라도 신경 써줘야 하는 아이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슈조가 이 부분에서 인정한 건 의외였지만 그의 말은 레이지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긍정의 뜻으로 끄덕여주었다. 그 대화에서는 유우야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만 눈치챌 수 있었던 레이지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조금 전의 유우야에게서 처음으로 괴리감을 느껴야만 했다.
변하지 않았다는 건 흔히 두가지로 나뉘기 마련이었다. 어떤 것에 대해 처음부터 별로 신경쓰지 않았거나 애써 모른 척 외면하며 꽁꽁 숨긴 채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것. 전자는 상관없지만 후자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심적 부담이 큰 편이었고 레이지는 슈조의 어조에서 그것이 후자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태화당을 나온 레이지의 얼굴이 전에 없이 나빠졌다.
"어쩔 수 없네요."
짧은 한숨과 함께 유우야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자신이 가고 난 후 아카바 레이지가 직접 찾아와 나눈 대화를 리플레이 해서 듣던 유우야는 진심과 난처함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럼 자신이 어제 본 밴의 주인은 아카바 레이지였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슈조까지 항복한 이상 자신이 더이상 뭘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체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슈조에게 마땅히 뭐라 할 수 없었던 유우야는 애써 수긍하며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가버리는 유우야의 마음을 짐작해서인지 닫히는 문 틈 사이로 보인 슈조의 표정이 어제의 아카바 레이지처럼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