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혼마루 아파트에 어서오세요!
츠루마루는 이치고와 미카즈키와 안면을 튼 뒤에 두 사람을 따라 이제부터 자신이 지낼 집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미카즈키의 말에 의하면 아직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스무명도 안 된다고. 츠루마루는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 같은데. 모두 좋은 사람이라며 웃는 미카즈키와 맞장구 치는 이치고를 보던 츠루마루는 얌전히 입을 다물며 시선을 돌렸다.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츠루마루를 슬쩍슬쩍 신경쓰는 이치고와 두 사람이 그러든가 말든가 상관하지 않고 츠루마루의 집으로 향하는 미카즈키였다.
이미 안면을 튼 이치고와 미카즈키는 어쩔 수 없었지만 츠루마루는 딱히 일정거리 이상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괜히 친해졌다가 뒷통수 맞기는 죽기보다 싫단 것이 본심쪽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섣불리 다가가지도, 손을 내밀 수도 없어 츠루마루는 속으로 끙 앓았다.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일상적인 대화를 해가며 겨우 도착했다. 츠루마루가 지낼 곳은 1402호였다. 미카즈키가 품안을 뒤적거리다 츠루마루에게 카드키를 건네주었다.
"맡아두었네. 이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 되었으니 잘 지내보세, 츠루마루."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츠루마루 군."
뒤이은 이치고의 말에 츠루마루는 카드키를 건네받으며 인상을 썼다. 군이 뭔가, 군이. 동갑이면서 굳이 경칭을 붙여야하는 이치고가 이쯤되면 이상해보일 정도다. 대학생인 주제에 갑갑하게 격식을 차리고 싶을까. 츠루마루는 이치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츠루마루를 느낀 건지 이치고가 멋쩍게 웃어보인다. 여전히 진심은 아니었다. 미카즈키가 그런 이치고의 모습을 봤지만 별 말 안하고 넘어간다.
"군은 붙이지 말게, 군은. 거리가 생기지 않나."
"아."
"다음부턴 되도록 그러지 말게나."
츠루마루가 그리 말하며 도어락에 카드키를 갖다대고는 문을 열어재꼈다. 불을 키지 않았지만 아직 낮이라 안쪽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츠루마루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문이 자동으로 잠기기 위해 닫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츠루마루가 현관을 지나고 문이 거의 닫힐 즈음 미카즈키가 입을 열었다. 묘한 울림을 담고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곳은 사연 있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지. 츠루마루, 자네는 선택된걸세."
갑작스런 미카즈키의 말에 츠루마루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틈 사이에서 미카즈키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이 들었다. 미카즈키의 눈은 밤이 아닌데도 그 안의 초승달이 선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츠루마루는 문이 완전히 닫히고도 몇 분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츠루마루가 살게 될 문이 완전히 닫히자 층의 복도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카즈키는 본인이 내뱉은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고, 그건 옆에 있던 이치고도 마찬가지였다. 미묘한 침묵 속에서 먼저 움직인 건 미카즈키였다. 그 뒤를 자연스럽게 이치고가 따라붙었다.
미카즈키의 말은 틀리지 않다. 이 혼마루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 중 하나. 그건 어떤 이유에서건 상처 받은 이들뿐이라는 것이다. 이곳에 들어온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치료제가 되어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이치고도 미카즈키도. 그리고 아직 츠루마루가 만나보지 못한 다른 이들도 그 점은 공통적이다.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츠루마루도 무언가에 상처 받고 만 것이겠지.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올 때마다 아파트에는 공지가 내걸린다. 츠루마루는 모르겠지만 이미 이치고와 미카즈키는 츠루마루를 보자마자 새 입주자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이치고가 츠루마루와 마주쳤을 때 함께 온 것이었다. 츠루마루가 길을 못 찾고 헤메고 있을 거라는 것은 쉽게 예측 가능했다. 모두가 그랬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미카즈키는 이치고가 츠루마루와 마주칠거라 생각하지는 못하고 심부름을 보낸 것이지만.
츠루마루로서는 천운이었다 할 수 있다. 미카즈키가 심부름을 시키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 될까 말까 한 아주 극악한 확률이었던 것이다. 입주자가 헤메고 있는데 거주자와 못 만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입주자가 오는 날은 입주자 본인 마음인지라 거주자들은 입주자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어서 언젠가 두어번 입주자가 밖에서 며칠간 노숙했던 경험이 있기도 했다.
"괜찮은가요, 미카즈키 상?"
"괜찮지 않을 게 있겠나. 게다가 어차피 자연히 알려질 것이네. 츠루마루는 그리 눈치가 없어보이지 않았으니 모두를 만나보면서 알아차리겠지."
"그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보다 내가 언젠가 말투 때문에 고생할 거라 했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지적받았구나."
"윽,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버릇인걸요."
사실을 찔려 얼굴을 붉히는 이치고를 보던 미카즈키는 그저 허허로이 웃었다. 배경 탓일까. 이치고는 늘 단정하고 예의 바르다. 정중하고 상냥하고 성실한, 거기다 빈틈없는 행동거지까지. 그게 오히려 이치고의 숨을 막히게 하는 원인이었다. 완벽한 자의 비애일까. 미카즈키는 이치고를 볼 때 종종 그렇게 생각한다.
이치고의 동생들은 전원 이치고와 피가 이어지지 않은 고아원 출신의 아이들이었다. 동생이라고 데리고 다니지만 솔직히 피도 이어지지 않았는데 돌보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이치고는 해냈다. 아니 해야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였지.
미카즈키는 그 당시를 생각했다. 이치고가 미카즈키를 이리 잘 따르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완벽한 이치고지만 그에겐 쉴 틈이 없었다. 몰아붙이는 이치고를 미카즈키가 숨 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그 어깨 위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게 이치고는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집안살림이 능숙하지 못한 미카즈키를 대신해 조금씩 도와주다보니 이런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는 이치고가 없으면 안된다는 걸 미카즈키는 알았다. 그 때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미카즈키는 후회했다. 왜 이치고인가. 자신 때문에 짐을 더 얹은 꼴이 될 것 같아 일정선 이상의 것에는 되도록 기대하지 못했다. 그 자신이 애정에 목이 마르더라도, 그리하여 죽더라도 이치고에게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미카즈키는 그 때 처음으로 침통해했다. 미카즈키는 애정을 갈구한다. 정상적인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미카즈키는 온전한 애정을 동경한다. 그게 어딘가 비뚤어졌더라도. 이치고는 그야말로 그런 미카즈키에게 적합했던 것이다.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집어삼킨다.
이치고라는 인물은 미카즈키에게는 과분했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당사자인 미카즈키는 오히려 맞다고 생각했다. 미카즈키는 이치고를 슬쩍 돌아다본다. 이치고는 때로는 든든하다. 이 이상 자신이 이치고에게 더 기대게 될까봐 불안하기만 한 미카즈키다. 아직 이치고는 짐을 전부 내려놓지 못했다.
본인으로 인해 이치고가 어깨 위의 짐을 더 짊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게 한번도 소원이라는 것을 만들지 못한 미카즈키의 현재 유일한 바람이었다. 이치고의 시선이 미카즈키에게 향하자 미카즈키는 기꺼이 시선을 맞춰주며 웃어보인다. 그러면 이치고도 그런 미카즈키를 뒤따르듯 웃는다.
"여전히 벽을 치고 있구나. 츠루마루에게도 진심으로는 웃어주지 않은게지?"
"반사적이랄까요. 진심이 되는 건 동생들과, 그리고, 미카즈키 상 뿐이니까요."
미카즈키의 물음에 이치고는 처음으로 쓰게 웃었다.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에 이렇게 바뀌어 버렸지만 어렸을 때의 자신은 분명 잘 웃고 또 잘 우는 아이였다. 지금에 와서는 이치고는 그 당시의 자신을 선명하게 떠올리지 못했다. 빛바랬달까, 퇴색된 느낌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당시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이치고는 너무 잘 알았다.
미카즈키는 이치고의 표정을 들여다보다가 아무 것도 들고있지 않은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치고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손을 그대로 움직여 이치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행동을 하는 미카즈키를 본 이치고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미카즈키에게 그런 표정 짓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전 괜찮아요, 미카즈키 상. 당신이 있고, 동생들이 있고, 그리고 모두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괜히 마음 쓰지 마세요. 정말 죄 짓는 것 같으니까요."
"누구에게?"
"미카즈키 상이지, 누구겠어요."
"그래."
짖궃은 이치고의 대답에 미카즈키가 그제야 살풋 웃는다. 정말 심장에 안 좋은 사람이라니까. 이치고는 미카즈키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아직 몇 달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치고의 머리를 쓰다듬던 미카즈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이번엔 미카즈키의 옆에서 걷는 이치고였다. 그렇게 츠루마루의 집에서 두 층 내려가 12층에서 걸음을 멈춘다.
1202호 앞에서 멈춘 이치고는 비어있는 한 손으로 품에서 카드키를 꺼내들고는 문을 연다. 열린 문 안으로 미카즈키가 먼저 들어가고 이치고도 뒤따라 들어간다. 곧이어 문이 닫혔다. 들어가서 한동안 나오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
미카즈키에 의해 움직이지 못했던 츠루마루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집을 둘러보기 위해 발을 놀렸다. 현관을 지나자마자 나온 넓은 거실에 츠루마루는 당황했다. 다른 집의 구조가 여기와 똑같다면 모르겠지만 자신의 집이 비정상적으로 넓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게 그 거실에 놓여져 있었다.
"피아노."
분명 손에서 놓았는데 버젓이 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앉은 피아노 한 대에 츠루마루는 저도 모르게 피아노가 놓여진 곳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가까이에서 본 피아노는 새 것이었다. 항상 쳤던 예전의 피아노는 아니었지만 결코 나쁘지 않은 피아노임을 츠루마루는 오랫동안 피아노를 접해본 만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피아노는 이미 조율은 끝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