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태어나기 전부터 약속했던거야
 
 
 
 
 
2.
 
 그 길로 LEO코퍼레이션 앞까지 와버린 유우야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들어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던 유우야는 머리를 들고는 하늘로 높게 뻗어있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LEO코퍼레이션의 정상과 주변에 보이는 푸른 하늘을 함께 시야에 담던 유우야의 시선이 일순 흐려졌지만 그 사실을 유우야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 속이 매우 서러워졌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유우야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난 건 그 순간이었다.
 그 때 이미 그렁그렁하게 눈에 물기를 가득 담고 있던 유우야는 뒤쪽에서 나는 인기척에 급히 오른쪽으로 돌려놨던 고양이 가면을 정면으로 돌려 썼다. 뒤쪽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뒤돌게 하기 전에 재빨리 먼저 뒤돌아 상대가 누군인지 확인했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온 인물에 마음만 더 심란해진 유우야는 아무 말 없이 상대방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상대는 다름아닌 줄곧 고민하던 대상자, 아카바 레이지였다.
 "……."
 "……."
 아무 말 없이 서로 바라만 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직히 짧은 한숨을 내쉰 레이지는 유우야를 스쳐 LEO코퍼레이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멀뚱히 보며 어떡할까 고민하던 유우야는 이내 따라오라는 듯 손짓한 뒤 LEO코퍼레이션으로 들어서는 레이지를 조심스레 따라들어갔다.
 
 "앉아."
 레이지만의 공간인 사장실까지 따라올라온 유우야에게 처음 건네진 말이었다. 그에 잠시 움찔한 유우야는 권해주는대로 눈 앞에 놓여져있는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넒고 깔끔하고 썰렁하다. 유우야는 사장실의 광경에서 그렇게 느꼈다. 쓸데없이 넓고 쓸데없이 깔끔한데다 굉장히 썰렁했다. 사장실을 둘러보는 와중에도 불편한 기색이 쓰고 있는 가면 밖으로도 내비쳐졌다.
 "불편하나?"
 조용한 가운데 자신을 향해 물어오는 말에 흠칫한 유우야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긍정을 표했다. 그에 유우야의 반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레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시선을 돌린 유우야는 천친히 무언가를 하는 레이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을 보던 유우야의 표정이 가면 속에서 일그러졌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여 주먹쥔 손을 떨던 유우야의 시야 안으로 컵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레이지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어서 유우야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뺐다. 그런 유우야의 행동에도 신경 안 쓴다는 듯이 레이지는 무심히 자기 할 말만 하기 시작했다.
 "마셔. 좀 나아지겠지."
 내밀어진 컵 안의 내용물은 코코아였다. 달큰한 향이 퍼졌다. 멍하니 컵을 집어든 유우야의 손 안에서 코코아의 따뜻함이 퍼져왔다. 곧 정신을 차린 유우야는 컵을 입에 대고는 한 모금 마셨다. 그에 몸 안쪽에서도 따뜻한 느낌이 퍼져서인지 짧게 떠는 유우야였다. 그런 것도 있었지만 사장실 안의 공기가 차가웠던 것도 있었다. 날씨에 맞춰 얇은 옷을 입고 있는 유우야에게는 조금 자극이 가는 온도였다.
 "저기, 여긴 보일러나 난방시설 같은 건 없어? 좀… 추운 것 같은데."
 몸을 움츠리는 유우야를 보고는 그제서야 생각이 미친 건지 레이지는 사장실에 놓여있던 유일한 책상쪽으로 향하더니 어떤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곧 누군가와 연결되었는지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건을 묻는 말에 레이지는 변함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나카지마. 사장실에 난방을 틀었으면 좋겠는데."
 -"네? 하지만 사장실에 난방은 단 한번도 킨 적이 없지 않…."
 "…좀 쌀쌀한 것 같아서 조금만 틀려는 거니까 잔말 말고 틀어."
 곧 수긍하는 말을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보던 유우야는 가면 속에서 살풋 웃었다. 생전 난방을 틀지 않다가 처음으로 난방을 틀려는 이유가 자신이 말을 해서라니. 웃고있는 입매와는 달리 유우야의 눈동자는 가라앉아있었다. 설마 했지만.
 
 잠시 후 사장실 문이 벌컥 열리고 유우야가 뛰쳐나와 급히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버렸다. 왠지 모르게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니, 그 눈동자에 비친 것은 두려움이었을까. 유우야가 사장실에서 나오자 밖에 있던 나카지마는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실 안에서 레이지는 소파에 푹 파묻힌 채 연신 마른 세수를 하고 있었다. 나카지마가 처음으로 보는 레이지의 피곤한 모습이었다.
 "나카지마, 난방 꺼."
 덥다고 느낀 레이지였다.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다지 확실하게 찌른 게 아닌 것 같은데도 유우야 안에서 퍼져가던 두려움을. 단순히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에서부터 발생한 궁금증이었을 뿐이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됐을까. 하얗게 질려서는 붙잡을 틈도 없이 뛰쳐나가버린 작은 등이 아른거렸다. 내일 다시 보자고 말했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어보자면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후."
 게다가 더운 것과는 별개로 피곤했다. 한 것도 없는데 유우야가 끼워지자마자 이런 피곤함을 느끼는 것에 레이지는 작은 의문만을 가질 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이지는 애써 생각나는 유우야에서 시선을 돌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장실을 나온 유우야는 즉시 엘레베이터를 타고 다시 1층으로 내려온 뒤 힘없이 터덜터덜 걸으며 마악 LEO코퍼레이션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뛰쳐나오기 직전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던 유우야는 문득 떠오른 희미한 장면을 다시금 회상했다.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옆에 있던 것은 분명 지금보다 어렸던 아카바 레이지였다. 고민하는 유우야의 앞에 갑작스레 사와타리가 튀어나왔다.
 사와타리를 보며 의아해하는 유우야였지만 사와타리는 잠시간 아무 말 없이 바라봐오더니 유우야의 팔을 잡아 끌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그렇게 몇 분이 걸려 LEO코퍼레이션에서 멀어지자 그때까지 잡고 있던 유우야의 팔을 놓아준 사와타리는 유우야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해. 어제 내가 느꼈던 걸 네가 못 느꼈을 리 없어."
 사와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유우야는 흠칫했다. 그런 유우야를 안 건지 사와타리는 묘하게 진지해진 눈으로 유우야를 바라봤다. 어제 아카바 레이지와의 대면에서 느꼈던 감정을 유우야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카키 유우야는 주변의 분위기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맞춰 행동하며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처음에 눈치챘을 때 사와타리는 사카키 유우야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무섭다면 굉장히 무서울 정도로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아카바 레이지에게서 본인에 대한 관심과 아직 여물지 않은 감정까지 읽어냈을 눈 앞의 당사자는 지금 무척 당황스럽고 난처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은근히 불안해하고 있는 듯도 보였다.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유우야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사와타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유우야에게 말했다.
 "괜찮을거다. 넌 은근히 운이 좋으니까. 아카바 레이지가 평생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너 몰래 널 지켜주는 녀석이 있으니까."
 "뭐? 그게 누군데?"
 "몰라. 그건 네가 직접 알아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쉽게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안 그러냐?"
 비밀이라는 듯 유우야에게 윙크해주고는 돌아가야겠다는 의견을 내비친 사와타리는 태화당으로 돌아가려는 듯 발을 옮겼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유우야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물론 그것도 쓰고 있는 가면에 의해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고마워."
 고마워, 사와타리.
 왠지 사와타리와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를 잘 읽는 유우야는 평소 사와타리의 행동보다는 그 분위기를 읽곤 했는데 사와타리에게서는 자신을 진심으로 싫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질투 쪽이 더 잘 느껴져서 그 점이 의아할 뿐 평상시에도 사와타리에게는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는 유우야였다. 그랬기에 오늘 일을 계기로 조금은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유우야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아카바 레이지의 감정은 오히려 유우야에게 있어서 버거울 뿐이었다. 딱히 같은 남자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것이 다른 쪽으로 변해버리면 그것보다 큰 부담감은 없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도 일부 그랬었던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에 관심에 그친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오히려 자신이 언제 누구를 좋아했었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여서 그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아직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아카바 레이지가 깨닫지 못한 것이 좋은걸까? 다시 여길 떠나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찾고 싶은 것은 태화당에 있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저버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소중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 결심을 한 사람의 마음을 눈치챘다고 해서 그만둬버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 아닐까.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는 상황에 유우야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사면초가에 진퇴양난, 설상가상이라고 할 만한 자신의 상황은 뒤도 없고 앞도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유우야였다.
 
 "다녀왔어요."
 "어서오렴, 유우야. …무슨 일 있었니?"
 집으로 돌아온 유우야를 반겨주는 것은 거실에서 나온 모친 사카키 요코였다. 집에 돌아온 유우야를 반겨주다가 얼핏 표정이 어두운 아들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카바 레이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유우야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고는 2층의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유우야가 저기압이네. 도대체 무슨 일인거지?"
 요코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가버린 유우야는 방문을 잠그고는 잠시간 방문에 몸을 기댄 채로 서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래로 처진 더듬이(?)는 현재 유우야의 기분 상태를 대변해주고 있는 듯했다. 유우야는 사장실에서의 일을 기억을 되집어가면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어떤 장면에서부터 다시 재생시키듯 되새겼다.
 
 코코아를 받아서 마시고 난방이 틀어질 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아카바 레이지가 가면에 대해 묻기 시작했을 때부터 망가져버렸다. 난방이 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코코아를 홀짝거리고 있던 유우야를 보던 레이지는 문득 이렇게 물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 벗어놓고 다니면 안 되는 건가?"
 그건 단순한 중얼거림에 더 가까웠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코아를 마시던 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가면을 벗는다 라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서서히 안쪽에서부터 퍼지는 무언가를 느끼기도 전에 유우야는 다소 거칠게 탁자 위에 코코아가 담긴 컵을 놓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떨어뜨리든 던지든 깨부실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걸 물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겨우 내뱉을 수 있었던 말은 겨우 그것이었다. 떨려오는 손만큼이나 어설픈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가 겨우 말한 것처럼 형편없을 정도로 듣기 싫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 겨우 맞잡고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그 순간에도 들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은 존재했다. 유우야는 코 끝이 찡해진다는 것과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그렇게 가면으로 가려버리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흡, 하고 숨을 멈췄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어깨를 움찔하는 유우야였지만 반박하려고 해도 그것은 말이 되어서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 맞았다. 누군가가 물어볼 저 말에 대한 답 따위는 애초에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누가 묻던 대답을 못할 테지만 왜 레이지의 물음이 자신을 더 몰아붙이는지 그 이유를 유우야도 몰랐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유우야의 가면을 어느새 다가온 레이지가 풀어버렸다. 갑자기 드러나는 시야에 유우야가 당황해서 고개를 들자 위에서 내려다보던 레이지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선명한 빨강과 짙은 자색이 섞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점차 빨강 안에서 퍼져나가는 어떤 것. 그것을 뭐라고 칭하면 좋을까. 혼란일까, 아니 그것은 아직은 공포가 되지 못한 두려움 쪽이 더 가까운 듯 싶었다.
 곧 하얗게 질려가던 유우야는 옆에 떨어져버린 가면을 거칠게 잡아채고는 소파 위에 발을 올려서고는 뒤로 몸을 회전하다시피 빙글 돌아 벗어나고는 사장실을 벗어나버렸다. 빈틈없이 재빠른 동작이었다. 등 뒤에서 내일 다시 보자는 레이지의 말을 들었지만 상관않고 LEO코퍼레이션에서 달아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었다.
 
 생각을 마치고 눈을 뜬 유우야는 침대쪽으로 향했다. 쉬고 싶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몸을 파묻은 유우야는 복잡하게 얽혀드는 생각들을 멈추고자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든다면 그거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바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한 번 감았던 눈동자는 하루동안 상당히 지쳐있었는지 다음날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간만에 단잠에 빠진 유우야였다.

 "으앗! 늦었잖아!"
 12시간 이상은 내리 잠들어있던 유우야는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시간에 반쯤 기겁하며 급하게 옷장에서 태화당의 신식 법사 전용 옷을 입고 재빠르게 세안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방과 1층의 거실을 한번에 이어주는 봉을 재주좋게 타고 내려와 주방의 식탁 위에 차려져 있던 아침용 계란 토스트를 집어들고 입에 문 채 빠르게 집을 나서더니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 유우야의 모습을 보던 요코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던 유우야가 늦는 것을 보고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적어도 한번쯤은 이랬어야 했다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요코의 그런 생각도 모르는 채로 태화당으로 향한 유우야는 제일 먼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와타리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사와타리의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에 원장실로 가서 슈조에게 물어봐야 하나 하다가 결국 [별읽기]를 슈조에게 보내고 잠시 쉬기로 했다. 전속력으로 뛰어왔던지라 산소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인 몸을 쉬어주며 근처에 있던 큰 나무 하나의 아래 기대어 앉은 유우야는 숨을 돌렸다.
 잠시 그렇게 쉬고 있자 슈조에게서 돌아온 [별읽기]는 사와타리가 현재 LEO코퍼레이션에 있다는 말을 유우야에게 전해주었다. 그에 사와타리가 LEO코퍼레이션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유우야의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떠다녔다. 그러나 곧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의 일로 가기는 좀 꺼림칙하지만 LEO코퍼레이션에 가야하는 유우야였다. 사와타리가 LEO코퍼레이션에 있다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겸사겸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유우야는 다시 LEO코퍼레이션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태화당을 나와 번화가 쪽으로 나오기를 느긋하게 30여 분, LEO코퍼레이션에 도착한 유우야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본사 건물을 미묘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건물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제 처음 왔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로비가 너무 썰렁해."
 건물 로비에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로비 자체가 돌아다니는데만도 몇 분이 걸릴 것 같이 넓은데다가 한 켠에 안내 데스크와 중앙 쪽에 위치해 있는 TV, 그 앞쪽으로 소파와 의자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빼면 딱히 볼만한 게 없다는 게 이상할 뿐이었다. 어느 건물이든지 처음 들어왔을 때 정면으로 보이게 되는 로비는 건물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된다는 것을 모를 아카바 레이지도 아닐텐데 어째서 로비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까.
 게다가 뭐랄까, 투명했다. 로비를 보는 사람들의 태도도 나뉘기 마련인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로비를 매일 볼테니 별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처음 LEO코퍼레이션에 온 사람들이나 낯선 공간에 적응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자신은 당연히 후자 쪽이었고 말이다. 동시에 로비 전체에 난방을 켜놨음에도 불구하고 그 투명함에 추워지는 느낌이 들어 어제와 같이 몸을 움츠리는 건 자연적인 조건반사였다.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는 유우야는 어제 아카바 레이지와 타고 올라갔던 엘레베이터에 몸을 싣고 최상층의 사장실로 올라갔다.
 사장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추는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유우야는 사장실의 앞에서 먼저 비서인 나카지마와 마주쳤다. 어제 한 번 봤던 얼굴이라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확인하자 뭔가 찔리는 듯이 힐끔거리기에 가면 안쪽에서 거리낄 것 없이 인상을 구기는 유우야였다. 나카지마의 반응이 이상해 아카바 레이지가 있을 사장실로 시선을 주던 유우야는 옆에서 말리려는 손길을 뿌리치고 예고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사와타리? 네가 왜 아카바 레이지랑……?"
 의문을 나타내던 유우야는 이틀 전으로 기억을 날렸다. 분명 자신 대신 LEO코퍼레이션에 먼저 왔던 것은 사와타리였다. 그리고 어제 결국 자신도 왔어야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사와타리와 아카바 레이지가 함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지? 다른 쪽으로 의문을 느끼는 유우야를 잠시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유우야가 오기 전부터 대화 중이었던 건지 유우야가 들이닥치자마자 끊긴 대화는 사와타리의 우세였던 듯 싶었다.
 멀뚱멀뚱 가만히 서서 사와타리와 아카바 레이지를 몇 번 번갈아 바라보던 유우야는 사와타리를 찾았던 것을 기억하고는 잠깐 보자며 사와타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장실 한쪽 구석으로 잠시 사와타리를 끌고 간 유우야는 아주 잠깐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이런 건 솔직한 게 제일이라며 냅다 고마움부터 표출했다.
 "어제는 고마웠어, 사와타리!"
 유우야의 말을 이해한 건 당사자인 사와타리 뿐이었다. 유우야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듣는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라서인지 사와타리는 유우야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런 사와타리의 모습에 답싹 끌어안는 유우야였다. 유우야의 머리카락이 사와타리의 뺨을 간질였고 그 느낌에 작게 웃던 사와타리는 바로 옆에 있는 유우야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신고."
 "응?"
 갑작스럽게 귓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란 유우야가 여전히 끌어안은 채로 머리만 사와타리 쪽으로 조금 틀고는 잘 못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와타리라고 성으로 부르지 말고 신고라고 이름으로 불러. 나도 이름으로 부를 테니까."
 "아, 응."
 사와타리의 반응에 잠시 멍했던 유우야가 끌어안고 있던 팔을 푸르고는 사와타리의 앞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걸 잠시 보고만 있던 사와타리는 곧 어떠랴 싶어서 유우야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유우야는 완전히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제부터 친구야!"
 사와타리가 악수를 받아준 게 기쁜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톤으로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유우야를 보며 사와타리는 웃고있을 뿐이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소파에 앉아있던 아카바 레이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유우야와 사와타리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사와타리는 태화당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유우야는 될 수 있으면 태화당에서 보자며 먼저 보냈다. 사와타리가 돌아가고 문까지 완전히 닫히자 잠시 사장실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유우야는 속으로 엄청나게 갈등을 빚고 있었다. 대화를 할 것이냐, 아니면 오늘 들린 것으로 퉁치고 다음에 만날 것이냐.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으려니,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와 같은 무덤덤한 목소리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나온 말인 것 같았다. 그에 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놀랐던 것 같았다.
 "왠지 오늘도 집중이 제대로 될 것 같지는 않으니 다음으로 미루지. 3일 후가 좋을 것 같은데."
 "아아. 여기 있으면 진정이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되면 유즈나 만나러 갈까."
 조금 뜬금없이 튀어나온 유즈의 이름이었지만 철회할 생각은 없는 유우야였다. 나오는대로 내뱉은 것 뿐이었지만 유즈의 이름을 말한 건 그 와중에 잘한 일이라고까지 생각되는 것이었다. 아카바 레이지와는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관계일테니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서 나온 말이기도 했다. 아카바 레이지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을 완전히 자각해버리면 그 날로 사무적인 관계는 끝나고 찾아야 할 것도 찾지 못한 채로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있어야 한다. 그것만은 곧 죽어도 싫은 유우야였다. 어떻게 해서 돌아온 보금자리인데 또 떠나있어야한단 말인가. 그럴 바엔 차라리 죽겠다고까지 결심할 수 있는 유우야였다.

 그렇게 헤어지고 유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유즈가 다니는 일반 학교로 발걸음을 옮기는 유의야의 걸음걸이가 상당히 무거워보였다. 신발을 바닥에 직직 끌며 걷고 있는 유우야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기분이 상당히 우울했다. 별다른 접점이 크게 없었는데도 처지는 기분이 들어 유즈나 빨리 만나 이런 우울함은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유우야였다. 유즈와 있으면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진다. 예전부터 항상 그랬는데 처음엔 마치 마법인 줄 알았던 유우야였지만 곧 유즈의 분위기에 자신이 익숙해져서 그렇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만큼 유즈는 자신에게 있어 비중이 큰 편이라는 이야기였다.
 "유즈라면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데. 지금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유즈를 연애 감정으로서 좋아하지는 않았다. 물론 호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고 딱히 유즈를 상대로는 사귀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가족 같은 느낌으로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 있겠지만 여하튼 자신은 그랬다. 그래도 혹시나 유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분명 해야할 일도 제쳐두고 제일 먼저 유즈에게 달려갈 것은 뻔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유즈에겐 항상 신세지고 있다는 그런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좋겠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일까.
 "어디 보자, 유즈의 학교가……. 아, 저기 있다."
 유즈 유-즈♪ 라며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시야에 들어오는 유즈의 학교를 향해 뛰어가는 유우야를 조금 떨어진 골목사이의 좁은 길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유우야는 유즈의 학교 담벼락에 기대어 태평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유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 있는 구름의 수를 느릿하게 세고 있던 유우야의 앞에 갑작스럽게 [별읽기]와 [시간읽기]가 나타났다.
 유우야가 그들을 향해 부른 적 없다고 하려던 찰나 벌려진 입은 다시 닫힐 수밖에 없었다. 유우야를 향해 돌연 강풍이 불어닥쳤기 때문이었다. [별읽기]와 [시간읽기]는 그 강풍을 알아서 막으며 동시에 유우야를 강풍에서 보호했다. 강풍이 유우야에게 닿지 못하고 그 주변의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튕겨나간 강풍이 유즈의 학교 담벼락에 부딪혔을 때였다. 강풍과 마찰한 학교의 담벼락은 그대로 부서져내렸고 그 광경을 보게 된 유우야는 기겁했다.
 "…뭐야. 단순한 강풍 아니었어?"
 그렇게 놀라워하는 도중 무언가 떠올랐는지 자신에게로 향하는 강풍을 빙자한 날카로운 무언가를 막아서서 보호해주고 있는 [별읽기]와 [시간읽기]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이 두 사역마는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보통 흔하게 존재하는 사역마는 주인의 말을 듣는 것만을 존재의의로 삼는다. 하지만 이 [별읽기]와 [시간읽기]는 주인인 자신의 명령도 듣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지금의 상황처럼.
 그 점에 대해선 어쩐 이유에선지 비밀로 해달라고 처음 자신에게 사역될 때 그런 조건으로 계약했었다. 그 조건으로 인해 유우야는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일말의 불안감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똬리를 틀었다. 급작스럽게 밀려오는 불안감에 미미하게 떨려오는 오른손을 꼭 붙잡는 유우야였다.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자 하나 둘 학교에서 빠져나오던 학생들은 갑작스럽게 학교의 담벼락이 무너져서인지 그 자리에 서서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 중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학교에서 나오던 유즈는 부서져버린 담벼락 너머에서 얼핏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앞 뒤 생각하지 않고 그쪽으로 달려나갔다. 덤으로 이름까지 부르면서.
 "유우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유우야는 유즈의 학교가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게 유즈의 목소리라는 것도. 유즈가 유우야에게 닿는 것과 유우야가 유즈를 향해 돌아보려던 때에 그 사이로 안개 같은 짙은 연기가 둘의 사이를 가려버려 유즈는 유우야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유즈는 유우야의 머리가 자신쪽으로 돌아보려던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유우야가 자신을 인지했음을 알았다. 유즈는 곧바로 유우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는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유즈의 목소리를 들은 유우야는 유즈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가려다가 주위가 빠르게 짙은 연기로 뒤덮히면서 일순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머릿속으로는 뒤쪽에 부서져버린 담벼락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느쪽이 유즈가 있는 방향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마치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듯했다. 유우야는 섣불리 움직이기보다 일단 눈을 감고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우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확실한 땅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박아넣고는 눈을 떴다.
 다행히도 연기 자체는 잠시 혼동을 주는 것 말고는 다른 영향은 끼치지 않는 것 같았다. 만약 연기 자체에 독(毒)이 섞여있었다면 자신은 이미 저세상에 있었을 것이다. 그대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우야는 연기 너머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를 발견하고는 유즈인가 싶어 그쪽으로 향했다. 만약 제대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유즈가 연기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을 거란 것도 생각해 가지 않았겠지만 지금 유우야는 아직 연기 속이었다. 연기가 보여주는 환각 속에 갖혀있는 유우야로서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여유가 되지 않았다.
 "유즈……!"
 유즈라고 생각한 인물에게 손을 뻗으려던 유우야는 그 인물의 지근거리까지 가서야 유즈가 아님을 알았다. 그에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던 유우야는 도망쳐야한다는 생각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유즈라고 생각하고 붙잡으려던 상대와 어느 틈엔가 시선이 마주쳐버렸던 것이다. 상대의 시선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읽어버린 유우야는 그저 멍하니 시선을 마주보면서 혼란스러움에 눈동자에 동요를 띄울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간 있었을까. 상대방이 예고 없이 유우야에게 무언가를 들이댄 것과 동시에 들이마셔버린 유우야의 심장이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 정도로 크게 한 번 뛴 것은 그 순간이었다.
 두근.
 그 소리를 들어버린 유우야가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천천히 감기며 몸의 중심이 스르르 무너지더니 앞으로 엎어져버리는 것을 그 앞에 서있던 상대방이 받아냈다. 색색 잠에 들어버린 유우야를 확인한 상대방이 씨익 웃으며 유우야를 어깨 위에 들쳐맨 채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별읽기]와 [시간읽기]가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우야는 잠들어있고 사방은 연기로 가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평소라면 무표정한 얼굴만 하고 있었을 두 사역마는 유우야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매서운 표정으로 유우야를 들쳐맨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상대방이었다. 유우야가 잠든 순간 사역마와의 연결이 끊어져 두 사역마는 사라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유우야의 두 사역마는 마치 스스로 유우야를 지키기로 결심했다는 마냥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적대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시간읽기]가 나선모양의 금속을 몸 앞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는 상대방의 머릿속에서는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망가려는 듯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상대를 보던 [시간읽기]가 [별읽기]에게 시선을 주었고 그에 [별읽기]는 눈을 감으며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이 상황에서도 유우야를 들쳐맨 상대방이 무언가에 부딪혀 뒤로 넘어졌다. 그 반동으로 유우야는 바닥에 내팽개쳐졌으나 상대방이 뒤로 넘어가며 떨궈진 것 때문인지 작은 생채기 정도만 생긴 채 여전히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시간읽기]는 갑자기 생긴 투명한 벽을 짚으며 빠져나가려는 상대방을 향해 나선모양의 금속을 내밀었다.
 무슨 느낌을 받은건지 흠칫한 상대방은 [시간읽기]를 향해 돌아보았고 공격 준비 중인 [시간읽기]의 모습에 유우야를 인질로 삼으려고 유우야를 찾은 상대방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역마들보다는 가까웠지만 꽤 멀리 떨어져버린 유우야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신이 유우야에게 닿는 시간보다 [시간읽기]의 공격이 자신에게 닿는 것이 먼저라는 건 안 봐도 뻔한 결과였다.
 ("유우야 님을 건드린 죗값은 톡톡히 치뤄줘야겠어. '범인' 씨.")
 정중한 것 같으면서도 불량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시간읽기]의 '말'에 상대방은 아까전에 했던 생각을 다시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사역마들의 말은 머릿속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방금 [시간읽기]의 '말'은 머릿속과 동시에 귀로도 들리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런 사역마는 이 세상에 없다. 주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개별된 행동을 하고 귀로도 들리는 사역마의 '말'은 이 세상의 사역마들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게 한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상대방은 한 가지의 확실한 결론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본인으로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 이 녀석들은……!"
 이 녀석들은 사역마 따위가 아니야!
 …라는 상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시간읽기]가 자신의 기술로 시간의 한 축에 상대를 가둬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는 [시간읽기]를 [별읽기]가 바라보벼 입을 열었다.
 ("[시간읽기], 차라리 사역마처럼 말하지 그랬어.")
 ("바보같은 말 하지 마. 다시는 만날 일도 없는 인간 따위에게 신경을 써주라 이거야? 신경을 써주는 건 유우야 님이나 친구분들한테만 하면 돼. 지금 이 녀석은 '예외'니까 그에 합당한 걸로 보내버렸어.")
 ("하여간 너란 녀석은…….")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야? '녀석들'이라면 눈치챘을 거라구?")
 ("뭐, 어쩔 수 없지. 마스터의 주변을 강화하고 철저히 대비하는 수밖에.")
 ("흐음. 넌 여전히 물러.")
 ("마스터가 바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평화'니까. 그 평화를 어지르는 녀석들만 우선적으로 배제하자.")
 ("…다른 녀석들은?")
 ("곧 이곳에.")
 그렇게 답하며 잠들어있는 유우야를 바라보는 [별읽기]에 [시간읽기]도 유우야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유우야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올리더니 부서지지 않은 학교 담벼락 한 쪽에 기대어 놓은 후 따스하게 한 번 바라봐주고는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별읽기]와 [시간읽기]였다.
 연기가 점점 걷히며 주위를 구분 가능하게 됐을 즈음 연기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유즈가 교문을 넘어서 도로변으로 나와 두리번거렸다. 유우야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유즈는 유우야가 나오지 않자 점차 불안에 떨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러다 학교 담벼락에 누군가가 기대어 누워있는 듯 보여서 몇 걸음 다가선 유즈는 그 인영이 유우야고 작은 생채기를 단 채 눈을 감고 있는 걸 알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 위해 유우야의 몸을 흔들었다.
 "유우야! 유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응? 유우야!"
 하지만 유즈가 아무리 부르고 흔들어봐도 깨지도 않고 유즈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유우야를 보며 뭔가 이상함과 동시에 불안감이 가슴 속을 지배해 나갔다. 유즈의 얼굴음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유우야아아아!!!"

 

 

 

 

 

 

 

틀림없이 태어나기 전부터 약속했던거야
 
 
 
 
 
0.
 
 태화당.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외곽에 기와로 지은 옛 모습을 그대로 남겨놓은 듯한 넓은 면적을 가진 건물이 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태화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이 건물은 보통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공부법을 배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역마를 불러내고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익히지 못하면 배우는 의미가 없어지기에 이 교육을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배우게 된다.
 태화당은 일명 '법사'라고 칭해지는 이들을 키워내는 교육기관이었다.
 그런 곳에 얼마 전, 신입생이 한 명 들어오게 됐는데 능력은 미숙하기 짝이 없지만 사역마를 부리는데에는 이미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특이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곧잘 아이들 사이에서도 걷돌며 조그만 시비에 툭하면 걸리곤 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가서 음료수 좀 뽑아 와!"
 근처에서 자신을 향해 말해오는 소리에 주위를 슥 둘러본 소년이 아무 말 없이 심부름을 시킨 이에게 손을 내밀자 상대에게서 동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날아온 동전을 솜씨 좋게 잡아채고는 심부름을 하기 위해 걸음을 빨리 해서 태화당 안에 위치해 있는 자판기를 향해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는 심부름을 시킨 장본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보호받고 있는 주제에 아무것도 모른다니."
 자신이 심부름을 시켜버린 소년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그에게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모여들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에 더더욱 인상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사와타리! 왜 매번 저 녀석에게 심부름 시키는 거야?"
 "맞아. 아직 완벅히 적응 못 했을텐데."
 그런 무지한 소리까지 듣게 된 상대방-이하 사와타리-는 순간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금 인상을 쓰며 심부름 시킨 소년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말했다. 어조는 한없이 비꼬는 어투였다.
 "정말 미련스런 녀석이라 그런다."
 게다가 뭐? 적응을 못 했어? 저 녀석이?
 사와타리가 아는 한 퍼져있는 소문과는 정반대라고 생각했다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그런 엉뚱한 말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그 출처부터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건 저 녀석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사와타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들이 그런 대화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자판기에 도착한 화제의 소년은 무슨 음료수를 뽑아다 줄까 하고 속편히 고민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우스꽝스러운 웃는 얼굴의 고양이 가면을 쓴 소년은 가면에 가려져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의 공기로 맹렬히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소년의 곁에 나타난 두 명의 존재는 그런 소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스터.)
 "? [별읽기]."
 전체적으로 하얗다고 할 수 있는 마술사의 부름에 평소때처럼 낮고 조용하게 답해주는 소년을 보던 그는 잠시 옆에 있는 검은색의 마술사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소년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리며 물어왔다.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찾으셨나요?)
 "으음."
 그 물음에 다른 의미로 고민하기 시작한 소년은 일단 자판기에서 눈에 띈 음료수 하나를 꾹 눌렀다. 심부름을 시킨 상대가 그 음료수를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소년이 신경쓸 부분은 아니었다. 철컹 소리와 함께 떨어진 음료수를 몸을 구부려 꺼내든 소년은 그 음료수를 보며 뒷말을 마저 이었다. 손 안에 전해지는 시원한 물기가 담긴 온도가 기분 좋았다.
 "몰라. 아직은 찾고 있는 중, 이랄까."
 소년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지 정면으로 쓰고 있던 고양이 가면을 오른쪽으로 돌려놓고 지금까지 마술사들이 봐온 그 어떤 미소보다도 환하게 웃어보이며 말을 마무리지었다. 태화당의 아이들은 소년이 이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재주 좋은 소년은 그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찾게 되면 무척 기쁠 것 같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 순간을 생각하는지 소년의 붉은 눈동자는 그 어떤 때보다 오랫동안 반짝거렸다. 기대감에 양 뺨도 발그레하게 되어서 소년을 생기있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던 두 마술사들도 코와 입을 가려버린 두건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듯하던 소년은 잊기 전에 음료수를 가져다주기로 하고 다시금 고양이 가면을 정면으로 돌려놓으며 얼굴을 가려버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년이 지나간 자리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잇는 바람이 머무르다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한편 태화당 건물 안쪽에 위치한 원장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업무용 책상 위에 놓여진 한 장의 종이를 의자에 앉아서 뚫어져라 바라보는 인물은 태화당에서 법사들을 키우고 있는 장본인인 원장이었다. 뒤쪽에 있는 창에서 햇빛이 비치며 어두운 원장실 안을 밝혀 책상 위의 종이를 비췄다. 그 종이는 태화당에 재적중인 누군가의 프로필이었다.
 "……."
 그 프로필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원장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필 안에 있는 인물의 사진은 그저 카메라를 보고 있을 뿐이었는 듯 전체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사진 속에서 붉은빛이 반짝이는 착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원장실을 빠져나간 뒤 조용해진 원장실 안에서 프로필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사카키 유우야.
 
 
 
1.
 
 "'태화당'에서는 뭐라고 했지?"
 "내일 중으로 괜찮은 실력의 견습 법사 한 명을 보내주겠단 답변이었습니다."
 "그래? 드디어."
 누구를 생각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자신의 상사를 보며 비서-이하 나카지마-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며칠 전 마을 축제로 인해 잠시 바람 쐬러 나갔을 때 누구를 본 것인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지만 보통보다 약간 텐션이 높다는 것을 그의 옆에 오랫동안 있었던 나카지마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그 최고치를 달린다는 것을.
 상사의 행동으로 보건대 원인은 분명 법사와 연관되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평소 관심도 없던 태화당에 축제 날을 기점으로 부쩍 신경쓰는 게 늘었다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한 것이다. 이 사태가 나아지려면 적어도 내일까지는 참아야 했다.
 
 한편 그런 나카지마의 고역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화당은 아침 댓바람부터 시끌벅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법사들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가지지 않던 이 시대 최고의 기업인 LEO코퍼레이션이 법사들을 지원해 준다는 걸로도 모자라 견습 법사 한 명을 전면적으로 밀어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태화당에서 선별한 인물이 어제 붉은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소년에게 심부름을 시킨 그 사와타리였다. 그 사실에 금새 자만에 빠져서는 어꺠 쫙 펴고 아침부터 힘주고 있는 중이었다.
 지나가다가 그 사실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사와타리를 본 고양이 가면 소년은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아무 말 없이 그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 모습을 사와타리도 봤지만 이번엔 굳이 터치하지는 않았다. 사와타리를 지나쳐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곳으로 온 소년은 근처에 있던 작은 연못가에 가만히 서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상해.'
 소년이 생각하기에 이번 LEO코퍼레이션의 행동은 무언가 이상했다. LEO코퍼레이션은 흔히 말하는 세계에 영향력이 막대한 대기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LEO코퍼레이션의 활동력에는 법사에 관한 사항은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생전 법사쪽으로는 관심도 주지 않았던 LEO코퍼레이션이 법사들을 지원해주면서 그 중 한 명을 전면적으로 밀어준다? 소년은 여기서 그 한 명에 초점을 맞췄다. 이 말은 LEO코퍼레이션에서는 이미 그 한 명을 누구로 할지 결정했다는 얘기 아닐까?
 "에휴. 너무 나갔다, 너무 나갔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설레설레 내젓던 소년은 원장이 몰래 찾고 있다는 말을 [별읽기]에게 전해듣고는 아무도 모르게 원장실로 향했다. 똑똑, 두어번 노크하고 들어간 원장실에는 원장인 히이라기 슈조가 소파에 앉아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꾸벅 인사하고는 슈조의 건너편에 앉자마자 무게있는 분위기가 없어지고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원장실에 들어오기 전에 고양이 가면은 오른쪽으로 돌려놓은 소년이었다.
 "유즈는 잘 지내요?"
 "우리 유즈야 너무 잘 지내서 탈이 아니잖니, 유우야?"
 먼저 말을 꺼내든 것은 소년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넘어가려는 소년사카키 유우야에게 그대로 넘어갈 뻔했던 슈조였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고는 되물었다. 그런 슈조를 보며 미소짓는 유우야였지만 그리 편해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그렇게 말하며 웃어보이는 유우야를 보던 슈조는 이유모를 울컥거림을 느껴야 했다. 오랜만이라는 유우야의 말에 따라 그들은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슈조의 딸인 유즈와 동갑이었던 유우야였던지라 둘이 함께 놀았던 적이 많았던 탓에 서로에게 그만큼 친숙했다. 그랬던만큼 유우야가 어느날 사라져버리자 유즈는 며칠을 울며 단식투쟁까지 불사질렀었다. 그러면서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유우야를 찾아오라는 협박 아닌 협박성 말들이었다.
 며칠 전 유우야가 태화당에 들어오면서 슈조는 우우야를 프로필의 사진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슈조는 유우야와 얘기를 하려고 계획중에 있었다. 그런 슈조를 안다는 듯 유우야는 한결같이 미소짓고 있었다. 슈조는 그것이 웃는 얼굴의 가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거기에 대해서 굳이 물어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어디에서 뭘하고 지냈던 거냐?"
 "그냥여행을 잠깐 다녔어요."
 "태화당에 다닐 생각은 직접 내린거냐?"
 슈조의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뒷말을 더 덧붙이려는지 유우야는 입을 열었다.
 "왠지 여기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거든요."
 "무엇을?"
 "글쎄요. 직접 보기 전까진 뭔지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며 모호한 의견을 내비치는 유우야였지만 그 뒷말은 슈조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유우야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 분명 그것일 것이다.
 "유즈나 한 번 만나봐라."
 "하하, 그래야죠. 맞지나 않으면 다행일지도요."
 유즈의 얘기가 나오자 지금까지 짓고 있던 미소의 일부가 자연스레 바뀌었다. 몸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미소. 유우야 안에서의 유즈의 의미는 그런 것이겠지. 슈조는 그런 유우야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 근데 전 왜 찾으셨어요?"
 "아아."
 유우야의 그 물음에 그제야 부른 목적을 상기한 슈조는 자신도 유우야가 반갑긴 반가웠나보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슈조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유우야의 시선을 마주 바라봤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그 의문의 해결방법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눈 앞의 당사자일거라고 생각한 슈조는 탁자 위에 올려놓아져 있던 봉투 하나를 유우야에게 건네주었다. 봉투를 봐보라는 눈치였기에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든 유우야의 시선이 내용물에서 떨어지지 않고 고정되었다.
 "이건."
 "이번에 LEO코퍼레이션 쪽에서 보내온 거다. 한 번 읽어봐라."
 한참만에 나온 유우야의 말에 슈조는 그렇게 말했다. 유우야에게 건네진 봉투는 새벽 댓바람부터 LEO코퍼레이션으로부터 총알 배송으로 날아온 통칭 '법사 지원, 그 이하'였다. 하지만 유우야가 집중한 것은 그런 광범위한 부분이 아니라 LEO코퍼레이션에서 지원해준다는 그 한 명에 기재된 특징 부분이었다. 그건 한 눈에 보기에도 사와타리가 아닌 자신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여기에 적혀진 건 저에 대한."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꿍꿍이."
 당황해하는 유우야에게 슈조는 꿍꿍이가 있다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꿍꿍이라고 해도 자신은 LEO코퍼레이션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부르려는 건지 고민하던 유우야는 문득 LEO코퍼레이션에 가는 것이 자신이 아닌 사와타리라는 것을 되새겼다. 거기서 뭔가가 떠오른 유우야는 알만하다는 심정으로 슈조를 바라봤고 그런 유우야를 보며 씩익 웃는 슈조였다.
 "부탁한다, 유우야."
 그런 슈조를 보며 평소보다 긴 한숨을 내쉬는 유우야였다. 이런 일 시키려고 몰래 부르려 한 것인가. 하지만 자신도 신경쓰이는 부분이었으니 겸사겸사라고 치기로 하는 유우야였다. 게다가 그 편이 마음이 더 편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유즈는 사와타리가 LEO코퍼레이션에 도착할 즈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번만은 유즈를 기분 전환용으로 만나기로 하는 유우야였다.
 
 드디어 대망의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전날 슈조에게서 사와타리가 몇 시쯤 LEO코퍼레이션에 도착하는지 미리 알아둔 유우야는 그즈음 유즈를 만나러 갔다. 만약 자신이 안 가서 괜히 불똥이 튀면 어쩌냐는 물음에 슈조는 아무 걱정 말라고하며 유즈나 잘 만나고 오라는 말만 들은 유우야였다. 걱정되긴 했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생각한 유우야는 유즈가 보일 즈음 [별읽기][시간읽기]LEO코퍼레이션으로 보내고 오랜만의 만남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즈!"
 유즈와의 간만의 만남에 냅다 달려가서 유즈가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안아버리는 유우야였다. 유우야와 유즈가 간만에 만나고 있을 즈음해서 LEO코퍼레이션에 도착한 사와타리는 이유모를 당황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던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에 삐딱한 미소를 짓고있는 LEO코퍼레이션 사장아카바 레이지는 현재 머릿속으로 이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해 평소와는 다른 목적으로 풀가동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무슨 이유가 있던간에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군. 분명 특징까지 써서 보내줬던 것 같은데."
 잘못된 원인부터 따져보자고 생각하고는 잘못된 내용을 은근슬쩍 돌려서 말했다. 머리가 나쁘지 않다면 금방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답게 와야 하는 인물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리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까지 확인한 후 나카지마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당장 가서 뭘 하는지 조사해 오도록. 중요하다 싶은 말은 적어놓고."
 이렇게 지시했을 때 유즈와 함께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유우야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가 곧 원상복귀 되어 미소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지명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애써 웃고는 있지만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느끼는 유우야를 재빨리 눈치채고 주의를 돌려주는 유즈 덕분에 해결 안 나는 일은 일단 뒷전으로 놔두고 유즈에게 집중하기로 하는 유우야였다.
 "정말 오랜만이다. 몇 년만이지?"
 "하하. 오래된 것 같지만 얼마 안 됐어. 한 일년 반만일걸?"
 "그것도 길거든?"
 "아하하."
 적당히 반응해주는 유우야였지만 기간을 실제로 따져보자면 이 년이었다. 이 년이지만 모두의 앞에서 모습을 감춘 건 일년 반이라는 뜻이었지만 굳이 유즈에게 그렇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만약 이 년이라고 하면 더 걱정하는 거야 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은 유즈에게 은근히 약했다. 미리미리 거짓을 섞지 않으면 진실 그대로를 말해버리는 것이다. 그 점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LEO코퍼레이션 쪽에 더 쓸데없는 말을 알려줄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컸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거야? 아빠 말로는 태화당에 다니고 있다며?"
 "?"
 궁금해하긴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설마 직구로 물어봐올 줄은 미처 몰랐던 유우야는 순간 당황해서는 걷던 걸음도 멈추고 유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유우야는 고민했다. 유즈는 괜찮았지만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는 쪽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이유를 말해버리면 두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로 압축되어버린다. 그건 왠지 모르게 싫었다. 두 질문의 이유를 따로따로 나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유우야였다.
 
 유우야가 유즈의 질문에 당황했을 즈음 생각을 끝마친 사와타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레이지였다. 얘기하면서 자신 대신 와야했을 인물이 유우야임을 알아차린 사와타리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갸웃했다. 그런 사와타리의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말해보라는 듯 손짓하는 레이지였다.
 "유우야 녀석이라면 굳이 이런 방법이 아니어도 '충분히' 스스로도 법사가 될 수 있을텐데."
 사와타리의 말이 전부 신경쓰이는 레이지였으나 특히 신경이 쓰이는 건 '충분히'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점이었다. 그냥 말해도 어휘는 이상하지 않을텐데 그 사이에 '충분히'라는 단어가 들어감으로써 뭔가 의미 있는 문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레이지는 거기에 초점을 맞췄다. 무언가 있다, 그렇게 직감했다.
 "'충분히'라는 건?"
 "아아. 유우야 녀석한테는 ''이 있달까요. 외딴 곳에 떨어져도 죽진 않을거예요, 그 녀석."
 레이지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눈치챈 사와타리였지만 그냥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정말 우연히 알게 된 것이었고 한가지 약속을 해서 말하고 다니기도 곤란했다. 그 한 번 이후로 다시 본 적은 없었지만 유우야를 볼 때면 그만한 존재감을 가진 녀석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속에서 열불이 나 심부름을 시키며 속을 달래고 있는 나날이었다. 하여튼 그건 그거고.
 "흐음."
 사와타리의 반응을 보아 헛다리를 짚은 건 아닌 모양인데 그게 뭔지 알려줄 마음은 없어보였다. 거기에 레이지는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했다. 자신은 알아야했다. 자신이 모르는 세월 동안의 유우야에게 있었던 일들을. 자신은 유우야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유우야는 자신을 기억해주고 있을까. 생각이 너무 길게 뻗어나갔다는 걸 눈치챈 레이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사와타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제안을 하기로 했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인물이 잘못되긴 했지만 이곳에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관심은 있는 거겠지?"
 협상인가, 아니면 거래? 태도를 바꾼 레이지에 대한 첫 생각은 저것이었다. 티는 잘 나지 않지만 이런 분위기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일로 인해 체험해본 적이 많은 사와타리였다. 지금 상황에서 우위를 점한 건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LEO코퍼레이션의 젊은 사장은 유우야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 덕분일까. 유우야에 대한 어떤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이 상황에서 사이에 유우야가 낀 게 마음에 들지 않긴 해도 그 덕분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으니 피장파장으로 칠까.
 "관심이야 많죠. 많기야 많은데, 그 전에 한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뭐지?"
 "사카키, 유우야에게 신경쓰는 그거. 단순히 관심뿐입니까?"
 이걸 묻고 싶었던 거로군. 떨떠름하게 내뱉어진 사와타리의 물음을 듣고 레이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와타리가 진짜로 묻고 싶어했던 질문. 처음부터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재밌다는 듯이 웃는 레이지였다. 무슨 이유였는지 엄청 서럽게 울던 꼬맹이를 달래줄 때 했던,
 "관심도 일부 있는 게 맞지만, 정확한 이유는약속, 때문일까."
 아직도 귓가에 울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며 들려온다. 많이 쳐줘봐야 여섯, 일곱 살로 보이는 꼬마가 숨 넘어가라 울어제끼던 그 날. 쑥스러운 마음에 헛기침과 함께 말했던 '내가 네 편이 되어줄게'. 같은 남자아이에게 했던 말치곤 왠지 모르게 프로포즈 같이 들렸던 말이었지만 덕분에 유우야를 잊지 않게 해준 고마운 말이기도 했다.
 "그냥 지켜봐주고 싶은 그런 관심이랄까. 본인은 전혀 기억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레이지를 보며 사와타리는 말을 잃어버렸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사와타리였지만 애써 벌어진 입은 그 어떤 소리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닫힐 뿐이었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유즈의 질문에 비밀이라고 답한 유우야는 그 이후로 유즈와 함께 놀러다녔고 저녁놀이 질 즈음 헤어지기 위해 걷고 있는데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유즈를 불러세우는 유우야였다.
 "유즈."
 "왜에?"
 "아까 물었었던 질문 있잖아. 내가 비밀이라고 했던 그 질문. 제대로 답할까 해."
 바뀐 유우야의 결심에 의외라는 눈빛을 하고 바라보는 유즈였다. 친한 이들은 알고 있다. 우유부단한 면이 두드러지지만 한 번 결정한 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은근히 고집이 센 게 유우야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유우야가 사라졌을 때도 그런 면이 두드러졌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유우야가 의견을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유우야는 은근히 고집이 세서 의견을 바꾼 적이 없잖아?"
 "그냥. 왠지 그러고 싶어졌어. 들을래?"
 "."
 결심은 했지만 유우야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유즈였다. 어떻게 해야 유우야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유즈는 알고 있었다. 그런 유즈를 보고 있자니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던 돌아왔다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실은 그 두 질문, 답이 같았어. 물론 약간 다르지만 기본은 바뀌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말이야."
 이유를 말해주는 유우야였지만 그 방법은 귓속말이었다. 왜 귓속말로 하는지는 몰랐지만 이유를 들은 유즈는 그게 다냐는 눈빛을 유우야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유즈의 눈빛에 계면쩍게 웃어보이는 유우야였다.
 "별 거 없지?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 얘기를 끝으로 그럼 다음에 보자라며 저 멀리 가버리는 유우야를 보던 유즈는 유우야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웃어보였다.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미소가 걸린 것은 덤이었다.
 유즈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던 유우야는 [별읽기][시간읽기]를 통해 들은 얘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카바 레이지가 자신과 했던 약속이라는 건 그의 말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기억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자세한 설명을 빼놓고 그냥 약속이라고만 하면 누가 아냔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유우야의 내면에서는 약속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유우야와 유즈가 헤어진 시각, LEO코퍼레이션에서 만났던 두 사람도 헤어졌다.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어낸 사와타리였지만 그 전제들에 전부 유우야가 어떤 형식으로든 얽힌 것에 은근히 기분이 얹짢은 사와타리였다. 순간적으로 아카바 레이지에게서 느껴졌던 느낌은 명백히 유우야를 향한 애정이었다. 아직까진 애정이라고 보기 조금 무리인 감이 있었지만 그걸 어렴풋이 깨달은 순간 말할 것도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그건 질투였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LEO코퍼레이션을 빠져나가는 사와타리를 내려다보던 레이지는 비서인 나카지마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보고 있었다. 유우야의 이동경로가 간단히 요약되어 있었고 특이상항으로는 일년 반동안 이곳을 떠나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점에 신경쓰인다는 듯이 미간을 구기는 레이지였다.
 "일년 반? 그 기간 동안 이곳에 없었다고?"
 ". 그런 말이 오갔습니다."
 "유우야가 누군가랑 만나고 있었나?"
 "누군가 알아본 결과 히이라기 유즈라는 소녀로 태화당 원장의 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같이 놀던 소꿉친구라는 것 같습니다."
 "간만에 만난 소꿉친구와 시간을 보냈다는 건가."
 일년 반만에 고향에 돌아와 오랜만에 소꿉친구와 놀았다 정도로 납득한 레이지는 거기에 대해선 우선 신경을 끄고는 다른 곳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그 일년 반동안 어디에서 뭘하고 지냈고 무슨 이유로 돌아왔다고 하지?"
 그 물음에 난처한 기색을 내비치는 비서를 보며 뭔가 틀어졌다고 예감한 레이지였다. 말해나 보라는 식으로 바라봐주자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애써 말하는 나카지마였다.
 "거기에 대해선 듣지 못했습니다. 처음 그 질문이 나왔을 땐 비밀이라며 말하지 않다가 헤어질 때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유를 말했습니다만, 직접 말한 게 아니라 귓속말로 한지라 그 내용까지는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귓속말이라."
 만약 유우야가 사와타리가 LEO코퍼레이션에 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의문이 문득 레이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니 그 전에 유우야가 소꿉친구라는 여자애와 만나기 전 그 아버지라는 사람을 먼저 만났다면 어땠을까. 태화당의 원장과 그 학생이라는 연결점이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한번쯤은 만나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레이지는 미소지었다. 조금이지만 한 방 먹었달까.
 "- 그럼 가볼까."
 되갚아주러 가야겠지?
 
 그 즈음 발걸음을 집으로 갈 것을 태화당으로 돌려 슈조와 만난 유우야는 LEO코퍼레이션으로 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별읽기][시간읽기]가 듣고 전해준 이야기를 다시금 이야기하는 유우야나 듣는 슈조의 표정이나 그다지 좋다고 보기 힘들었다. 슈조는 어떤 의미에서는 충격받아서이고 유우야는 다시금 떠올린 레이지의 영문 모를 소리들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파도처럼 되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얘기가 끝나자 원장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어떻게 생각하니?"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답이 없네요."
 한숨과 함께 되돌아온 답변에 슈조도 똑같이 느꼈다. 묘하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도 일부 휘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난 결사반대다, 유우야. 한 번 잘못 걸리면 악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야."
 "으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라고 애써 마주 대답해주지 못한 이유는 왠지 모르게 긍정했다가 슈조의 말대로 됐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은근히 식은땀을 흘리며 웃어보이던 유우야는 슬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기분에 휩싸여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집에 가면 자는 것도 내팽개치고 줄곧 고민하게 될 것 같았지만 말이다.
 태화당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비싸다는 걸 알 수 있는 밴 한 대가 옆을 지나쳐갔다. 잠깐 그쪽으로 시선을 주던 유우야는 이내 제 갈 길을 마저 가기 시작했다. 그 스쳐지나감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올진 유우야조차도 알지 못했다.
 
 태화당으로 향하던 중 집에 가는 듯한 유우야와 지나치게 된 레이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유우야는 차 안을 볼 수 없었지만 레이지는 유우야를 볼 수 있었다. 오늘은 고양이 가면을 쓴 기색이 보이지 않아 그 모습 또한 익숙하면서 새로워보였다.
 똑똑. 유우야가 집에 갔기 때문에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다고 판단하고 집에 갈 준비를 하던 슈조는 찾아온 사람이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한마디 해줄 생각으로 상대를 바라봤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상대는 다름아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우야와 함께 화제에 올렸던 LEO코퍼레이션의 젊은 사장아카바 레이지였다.
 ",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다가 우리가 명시했던 아이와 만났는데 오늘 오지 않고 다른 인물이 왔더군요."
 쓰고 있던 안경을 쓰윽 올리며 눈을 빛내는 레이지를 보며 슈조는 생각을 회전시켰다. 유우야를 만났다고? 이야기했나 라고 생각한 슈조였지만 그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유우야의 성격을 알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에 상대가 눈치챘음을 알아챈 슈조였지만 이쪽은 이 순간을 대비한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절반은 도박성이었지만 말이다.
 "답신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내일, 그러니까 오늘 괜찮은 실력의 견습 법사 한 명을 보내준다는 거였습니다만 기억하십니까?"
 "."
 분명 어제 나카지마가 말해준 내용이었고 꼼수를 부린 것 같지는 않은 내용이었기에 그대로 전해들은 기억이 있는 레이지는 가볍게 긍정했다. 그것을 보고 기회라고 생각한 슈조는 이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런데 어제 그런 봉투가 오고 전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이미 사와타리 군으로 확정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전체적인 내용을 확인했던 탓에 이미 결정해버린 것을 무를 수는 없잖습니까? 한껏 기대중인 그 기대감을 꺾을 수는 없었지요."
 슈조가 말하는 것을 듣던 레이지는 미소지었다. 이거야 완전 능구렁이로군. 자칫하다간 자신이 말려들 가능성이 있어 타개책을 생각하는 레이지였지만 이 상황 자체가 그렇게까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상황수습에는 힘을 써줬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왜 그렇게까지 유우야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슈조의 그 말에 레이지는 나름 흥미를 내비쳤다. 아까 전의 사와타리도 그렇고 지금 눈앞의 사람도 그렇고 그 이유가 왜 궁금한 것인지 레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난 그 누구에게도 이해해달라 말한 기억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 대답을 듣던 슈조는 왜 세간에서 아카바 레이지를 말할 때 철옹성이라고 말하는지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았다. 따지는 쪽이 아닌데도 빈틈이 전혀 없었다. 수긍할 건 수긍하지만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면은 유우야와는 정반대였다. 그런 면이 슈조에게 믿음을 주었다. 인정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감정이지만 막연히 아카바 레이지라면 괜찮을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상처가 많아 옆에서 귀찮더라도 신경 써줘야 하는 아이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슈조가 이 부분에서 인정한 건 의외였지만 그의 말은 레이지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긍정의 뜻으로 끄덕여주었다. 그 대화에서는 유우야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만 눈치챌 수 있었던 레이지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조금 전의 유우야에게서 처음으로 괴리감을 느껴야만 했다.
 변하지 않았다는 건 흔히 두가지로 나뉘기 마련이었다. 어떤 것에 대해 처음부터 별로 신경쓰지 않았거나 애써 모른 척 외면하며 꽁꽁 숨긴 채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것. 전자는 상관없지만 후자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심적 부담이 큰 편이었고 레이지는 슈조의 어조에서 그것이 후자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태화당을 나온 레이지의 얼굴이 전에 없이 나빠졌다.
 
 "어쩔 수 없네요."
 짧은 한숨과 함께 유우야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자신이 가고 난 후 아카바 레이지가 직접 찾아와 나눈 대화를 리플레이 해서 듣던 유우야는 진심과 난처함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럼 자신이 어제 본 밴의 주인은 아카바 레이지였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슈조까지 항복한 이상 자신이 더이상 뭘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체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슈조에게 마땅히 뭐라 할 수 없었던 유우야는 애써 수긍하며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가버리는 유우야의 마음을 짐작해서인지 닫히는 문 틈 사이로 보인 슈조의 표정이 어제의 아카바 레이지처럼 어두워졌다.

 

 

다시 쓰여진 아크파이브

판타지 능력자물

 

 

 

 

 

 

 

 

ZERO. 시작을 여는 이야기

 

 

 

 

 

마이아미 시, 3번지 길가.

 

아유는 친구들과 놀고 해질녘이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유는 그저 친구들과 논 뒤 평소보다 조금 늦었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힘껏 땅을 박차 달렸다. 그저 잡히기 전에 집에 가지는 못해도 적어도 세이프티 에리어[안전구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저것들에게 잡히면 끝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도 않았고 안다 해도 자신은 대처할 방법도 없었기에 그저 열심히 다리에 힘을 줘서 앞만 보고 달려나갔다. 재빠른 저것들에게서 아직까지는 운이 좋게도 잡히지도 않았고, 앞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안전할 수 있는 세이프티 에리어도 보이기 시작해 힘들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고 다짐했을 뿐이었다. 그것 뿐이었는데.

 

 

 

“아앗!”

 

 

 

그 사실에 안심해서인지 길가 위에 툭하니 튀어나와 있던 돌맹이 하나를 보지 못해 순간적으로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생각보다도 더 안심한 마음이 더 큰 모양이었던 것 같지만 지금으로선 그 탓에 바닥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더 컸다. 짧았지만 아유는 자신이 허공에 떠있던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철푸턱 하고 엎어진 아유는 바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지금 상황에 울지 않은 것만도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아유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 했으나 넘어질 때 잘못되었는지 다리가 쓸려 무릎께가 쓰라려 왔다. 그래도 여기서 체념하면 안 된다. 줄곧 학교에서 강조했던대로 포기하면 끝이라는 것을 아유는 잘 알고 있었다.

 

포기하면 분명 죽는다. 그 생각 하나로 아유는 오기로라도 일어나려 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상체부터 조심히 일으키고는 다리를 조심히 세워 겨우 제자리에 설 수 있었다. 일어날 때 무릎에 힘이 들어갔는지 쓰렸지만 아프다고 투정할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핀치라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한 걸음을 내딛으려고 한 아유였지만, 문제는 아유가 일어설 즈음엔 이미 아유를 쫓던 것들이 달려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키아아악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소름이 돋은 아유는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 선두에서 입을 벌리고 아유를 향해 달려드는 괴물의 형상을 한 무언가, 시선이 맞고, 그리고, 그리고─어떤 힘이 작용했는지 아유에게 닿기 전에 튕겨져 나가 조금 떨어진 바닥에 처박히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 아유는 놀란 가슴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튕겨버릴 거면 제대로 튕기라고! 대충 하지 말고!”

 

“…졸려.”

 

“아 씨!”

 

 

 

아유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즈음, 아유의 뒷쪽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평불만을 내비치는 목소리와 무기력한 듯 힘이 없는 목소리의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아유가 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열받아서 왁왁거리거나 정반대로 모든 것에 무심하니 졸린 듯 연신 하품만 하고 있었다. 그들을 처음 보는 아유조차도 두 사람이 서로 잘 맞지 않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들은 모든 것에서 정반대를 달리고 있었다. 아유가 상황에 맞지 않게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 너!”

 

“에, 옛!”

 

“괜찮냐?”

 

“어….”

 

“저 녀석들을 상대로 포기 안 했잖아? 잘했어!”

 

 

 

아유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아유보다는 나이가 있어보이는 같이 있는 이에게 왁왁대던 그 소년이었다. 그 소년의 옆에 있는 다른 소년도 소년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갑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지는 물음에 당황한 아유가 얼결에 대답하고, 이내 아유를 걱정해주고 칭찬까지 해준다. 자신을 완전히 아웃 오브 안중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으나 그들은 아유가 있다는 걸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뒤는 나한테 맡겨요.”

 

 

 

금방 끝낼 테니까. 그렇게 뒤이어 말한 것은 등장부터 연신 하품만 하던 소년이었다. 어딘가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은 아유를 슬쩍 본다. 느릿한 그 말에 옆에 있던 다른 소년이 화들짝 놀라서는 쳐다보았고,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더니 지금껏 아유를 쫓아오던 녀석들에게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던 아유의 곁에 서있던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아유를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아유가 당황할 새도 없이 멀지 않은 세이프티 에리어까지 달려간다.

 

 

 

“저 녀석은 저래 보여도 할 때는 하는 놈이야.”

 

 

 

걱정하는 아유를 알았는지 달리며 하는 말에는 강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문득 남은 소년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유는 곧 주변에 깔리는 무거운 공기를 느꼈다. 이 이후는 아유가 세이프티 에리어에 들어가는 바람에 보지 못했다. 세이프티 에리어로 아유를 데리고 온 소년은 3번지 세이프티 에리어의 책임자에게 맡기고는 남겨두고 온 소년에게로 돌아가는 듯 재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아유는 그렇게 세이프티 에리어에서 무릎의 상처를 치료 받고 집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

 

 

 

 

 

“흠, 그렇단 말이지.”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듯, 상대쪽에서 긍정의 답이 돌아온다. 보고를 듣고 있던 듯하던 인물이 앉아있던 의자에 몸을 더 깊숙히 묻고는 한쪽 다리를 꼰 채 그 위에 두 손을 맞잡듯 올려놓는다. 자주 취한 자세인지 참으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는 머릿속에서 들은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눈 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떠오른다.

 

 

 

“그래서 습격당한 여아는 잘 돌아갔나?”

 

-네.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까지 보고 왔다고 합니다.

 

“흐음.”

 

 

 

처음에 떠오른 사진 옆으로 아직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나잇대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그건 분명히 아까 습격받았다가 도움받은 아유였다. 두 사진을 잠시간 번갈아보던 인물은 곧이어 “접점은?” 이라고 물었다. 그에 상대쪽에서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음에 대한 답을 돌려준다.

 

 

 

-모르는 사이라고 합니다. 오늘 처음 만났다는군요. 그 소년 말고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다는 것 같았습니다만, 같이 있지 않아 그쪽의 사진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 답변에 처음 나타난 사진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인물이었다. 그곳에 있는 건 아유를 데리고 세이프티 에리어까지 왔던 예의 그 소년으로, 씨익 웃고 있는 모습에서 자신감이 넘쳐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뒤끝이 없는 시원스런 성격처럼 보였다. 표정은 웃고 있었으나 묘하게 눈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세이프티 에리어에 들어섰을 때 찍힌 사진일테니, 감이 좋은 듯도 싶었다. 어쩐지 관찰하는 듯한 눈빛처럼도 보였다. 여하간 이 소년은 세이프티 에리어 자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묘하군.”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그저 혼잣말이다. 보고는 이것으로 끝이겠지? 이만 쉬어도 좋아.”

 

 

 

그 말에 건너편에서 밝은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여전히 소년의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가만히 턱을 매만지는 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조금 전보다 깊어진 눈만이 생각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부하격인 직원에게는 혼잣말이라고 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가 느끼기에 소년은 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냥 넘어갈 법하지만 무시하기에는 자꾸만 무언가를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나카지마.”

 

-부르셨습니까.

 

“오늘 소동에서 연관된 이 소년을 찾아보도록.”

 

-알겠습니다. 바로 조사에 착수하겠습니다.

 

 

 

자신의 전속 비서에게 그렇게 연락을 때린 그는 가만히 생각했다. 쉽게 찾아내기는 힘들겠다고. 지금까지 자신들보다 먼저 반응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거의 우리쪽보다 먼저 움직였고 그들이 해결했다. 그것을 모르는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우리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우리 소속이 아니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이를테면 초조함이랄까,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게밖에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제껏 침묵하던 그들-적어도 한 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이 어떤 이유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알 방도는 없었다. 모습을 드러냈다고는 해도 소년을 본 사람은 피해 당사자인 아유라는 여자아이와 3번지의 세이프티 에리어의 직원들뿐, 자신과 나카지마를 포함해도 극히 소수의 인원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잠적이 가능한 거지.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다시 나카지마를 호출했다.

 

 

 

“혹시 모르니- 아유카와 아유라는 여아의 감시를 부탁하지.”

 

 

 

이걸로 걸리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줄곧 앉아있던 의자를 반바퀴 돌려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이 마이아미 시 어딘가에 그들이 주로 생활하는 공간이 있겠지. 벽이어야 할 곳을 유리창으로 만들어버린 탓에 밤의 도시는 곳곳에 보이는 네온사인들과 자동차 불빛, 가로등의 불빛 등으로 밝혀지고 있었다. 이 도시는 아름다웠다.

 

 

 

“이 마이아미 시를 더럽히는 녀석들은 이 아카바 레이지의 이름으로 용서 못한다.”

 

 

 

드디어 알려진 이 남자의 이름은 아카바 레이지. 이 마이아미 시의 대표 기업으로 꼽히는 LEO코퍼레이션의 젊은 사장이었다. 어린 나이와는 별개로 수완이 좋기 때문인지 딱히 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도 크게 반발이 일어나지 않은 천재였다. 딱히 비밀주의를 밀지는 않으나 그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계획은 극히 일부밖에 드러나지 않기도 하고 대략 몇 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의 이름 앞에는 곧잘 “역시” 나 “과연” 따위의 수식어가 들어가곤 했다. 그 본인은 딱히 신경쓰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

 

 

 

 

 

“다녀왔습니다!” X4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곧 주방 쪽에서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나오는 여성 한 명. 현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년들을 향해 다가가 한 명씩 꼭 안아주자 그제야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명이 서로 앞다투어 화장실로 향하는 모양새를 보며 언제나처럼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바라보는 여성이었다. 손을 씻는 것 뿐이건만 뭐가 그리 재밌는지 꺄르륵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있다 들어갈 모양인지 거실에 가만히 서있는 나머지 둘은 언제나처럼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제스쳐에 여성은 웃음을 참으려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는 숨길 수 없었다. 곧 화장실에서 머리며 옷까지 푹 젖어버린 두 소년이 나왔다. 두 사람 모두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창 저들끼리 놀고서는 서로에게 삐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못해 이제는 일상으로 자리잡은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둘이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는 각자 손에 하나씩 수건을 들고 나온다.

 

 

 

“으붑.” X2

 

“가만히 있어. 다 젖었잖아.”

 

“이제 이 패턴은 그만 해주지 않을래요? 질리니까요.”

 

 

 

손에 든 수건으로 머리부터 말려주며 한마디씩 하는 두 사람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인 두 소년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불만인지 입이 댓발 튀어나왔지만 끝내 불평은 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붙들려 얌전히 머리를 말린 두 소년은 수건을 건네받아 대충 옷의 물기를 털어내고는 2층의 방으로 올라간다. 아마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것일테다. 그 사이에 나머지 두 소년은 젖은 수건을 빨래통에 던져넣고는 주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옷을 갈아입은 두 소년이 주방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의 저녁식사가 시작된다. 소년들이 좋아하는 반찬들이 잔뜩 있는 밥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지만 현장에서 뛰고 온 소년들은 배가 고픈 모양이다. 허겁지겁 먹는 한 명, 얌전히 먹는 두 명, 무슨 반찬을 먹을지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는 한 명까지. 젓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하던 소년이 먹을 반찬을 정했는지 젓가락을 향하기도 전에 밥 위에 반찬이 얹어진다. 도르륵 눈동자를 굴리자 옆에서 얌전히 먹고 있던 소년과 시선이 맞는다. 서로 시선을 맞추고 있다 이내 밥 위에 얹어진 반찬과 함께 밥을 입 안으로 들고가 먹는다.

 

우물거리며 밥과 반찬을 씹는 걸 보던 소년도 이내 웃으며 밥 먹는데 열중한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건너편의 두 소년은 표정이 짜게 식는다. 매번 저러기도 힘든데 잘도 하는 소년과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는 또 한 명까지. 아까 아유를 구한 두 사람은 아유가 생각했던 대로 그다지 맞지 않는 듯 하는 행동도 달랐다. 왁왁대던 소년은 그저 벙쪄 있었는데 젓가락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기력한 다른 소년은 그저 반찬으로 향하던 젓가락을 입에 물고 슬쩍 웃을 뿐이었다.

 

저녁을 먹고나자 여성이 컵 네 잔에 코코아를 타와서 마시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전체가 하나의 방이었다. 오른쪽과 왼쪽 끝자락에 각각 침대가 2개씩 있었고 그 중간에는 바닥에 카펫이 깔아져있고 그 위에 탁자 하나와 의자 네개가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책장에 책들이 꽂혀있는 작은 서재, 왼쪽에는 컴퓨터가 있는 책상과 그 옆쪽에 교과서가 꽂혀진 네개로 나뉘어진 작은 책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네 소년은 중간에 있는 탁자를 둘러싸고 의자에 각자 앉았다.

 

 

 

“통합 지도, 마이아미 시.”

 

 

 

그 말을 한 건 아유를 구한 이 중 한명으로 세이프티 에리어까지 아유를 데려다준 그 소년, 유고였다. 유고의 말에 그들 사이에 있는 탁자 위로 홀로그램 하나가 떠오른다. 그곳에 나타난 것은 분명히 전국의 지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한 도시를 나타내었다. 바로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이아미 시의 지도였다. 위치가 좁아져서인지 처음 전국의 지도보다는 크기가 크고 어디가 어딘지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잠시간 들여다보고 있던 유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이상 없다는 그 뜻에 몸의 긴장을 푸는 나머지 세 소년들이었다.

 

 

 

“그나저나 어쩔거야, 유고? 유고의 모습, 분명 LEO코퍼레이션 쪽에 들어갔을 텐데…….”

 

 

 

걱정스러운 말투로 처음 운을 뗀 것은 유야였다. 네 소년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여린 편에 속하는 유야는 당장 유고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집에 왔을 때의 그 밝은 모습 따위는 없었다. 밝은 편인 성격은 진지할 때는 진지할 때를 가리는 편이었다. 유고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걱정의 빛만이 가득했다. 그런 유야를 보던 유고는 씨익 웃으며 유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걱정 마, 유우야! 내가 누구냐? 유고님이라고?”

 

“저도 처음엔 당황했다구요. 갑자기 세이프티 에리어로 향하다니, 저 인간 미친건가 따위의 생각 했다구요?”

 

 

 

유고의 말을 태연히 받는 것은 오늘 유고와 함께 나갔던 소년. 오늘의 일을 생각하는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다. 하지만 그걸 이곳에 있는 소년들은 알 수 있었다. 몇 년이나 옆에 있으면서 저절로 알게된 상대의 감정 표현이었다. 평소에는 미덥잖은 면이 강하지만, 유고가 장담했던 대로 할 때는 하는, 그런 소년이었다. 소년의 말을 들은 유고는 다시 발끈해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주로 멍해보이고 표정 변화가 적은 소년과는 참으로 반대되는 반응이었다. 정반대도 저런 정반대가 없었다.

 

 

 

“잠, 유리! 넌 내 파트너잖아! 너도 나를 못 믿으면 어쩌라고?!”

 

“그래서, 유고. 네가 아무런 생각 없이 세이프티 에리어에 얼굴을 비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타개할 상황은?”

 

“걱정 마셔. 그쪽 대비책은 완벽하다구. 하지만, 그래. 언제가 됐든 일단 들키기는 할거야. 처음에도 말했지만 언제고 들킬거라고는 생각했으니까.”

 

 

 

유고의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머지 한 소년, 유토는 유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고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표정이 풀리며 유고의 쓰다듬을 가만히 받고 있었다. 유야는 정말 머리를 쓰다듬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후와와 거리며 풀어지는 얼굴은 상황과 맞지 않게 안정되는 느낌이 있었다. 유리도 유야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이걸로 끝낼까. 내일을 대비해 일찍 자자구.”

 

 

 

곧 2층의 불이 꺼지고 네 소년은 각자의 침대 속으로 몸을 묻었다. 푹신한 침대 감각에 나름 오늘 하루 고생한 심신을 쉬게 하기 위해 모두들 눈을 감고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럴 때 유야의 “모두 잘 자.” 라는 소리에 각자의 방식대로 화답해주며 완전히 의식을 수면 깊숙히 덮어두며 잠들었다. 곧이어 고르게 숨 쉬는 소리만이 작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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