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시점의 이야기를 다루는 외전입니다(현3학년이 2학년, 현2학년이 1학년 갓 입학한 시점)
※ 본편과 연관성 있는 외전으로, 전편과 이어집니다
-아카아시 side
입학식을 끝낸 일주일 뒤였다. 현재 아카아시는 <고민상담해결소>에 와 있었다. 딱히 아카아시가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신입생들이 부활동을 정하는 날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카아시가 이곳에 외 있는 이유라면 그래, 이끌렸다고 할 수 있었다.
오이카와에 의해서.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어쩌면 나름대로의 조짐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아카아시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시작은 이틀 전이었다. 그 삼일 전에 보쿠토와 처음 만난 아카아시는 본인만 모를 뿐인 기묘한 이끌림을 눈치채지 못했다.
보쿠토를 시작으로, 이미 이끌림은 시작되었다는 것을.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입학식 날에 본 사람이 보쿠토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그 이틀 뒤에 보쿠토와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아카아시의 변환점은 찾아와 있었다.
입학식 후 5일째.
아카아시가 첫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보쿠토와의 만남에서 3일째.
그리고 아카아시가 <고민상담해결소>에 오게 된 일주일인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
그곳이 아카아시에게 있어서의 첫번째 분기점이었다.
별 거 없었다. 아니 정말 별 거 아니었을 일이었다.
그 날도 아카아시는 나름대로 후쿠로다니에 적응하며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카아시가 타교에 심부름을 갈 일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심부름을 시킬 수 있었지만 그 날은 어째서인지 아카아시가 그 심부름을 다녀올 상황에 놓여있었다.
심부름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간단한 일이었다. 서류 몇 장을 네코마로 갖다주면 끝나는 쉬운 일이었다. 단지 가깝다고는 하나 네코마까지 가는 길이 짧지는 않다는 것이었지만. 아카아시도 그 점만 감수하면 금방 끝내고 올 수 있어서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심부름을 위해 네코마로 향했다. 문제는 네코마에 도착한 뒤 얼마 후에 일어났다. 심부름 때문에 온 아카아시를 들여보내고, 그렇게 네코마에 들어온 아카아시는 빨리 끝내고 후쿠로다니로 돌아갈 생각에 걸음을 서둘렀다.
아카아시에게 있어서 같은 부지 내였지만 네코마는 엄연히 타교였던지라 이왕 온 김에 심부름을 하며 조금 구경하고 가자는 심리가 문득 치고 올라왔다. 그렇게 다짐한 아카아시가 각 교무실을 들리며 서류를 돌리면서 시선을 굴리며 구경하던 중이었다.
“네코마엔 확실히 적응하고 있어, 켄마?”
문득 심부름을 내세워 네코마를 구경하던 아카아시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씩이지만. 들려온 물음에 같이 있는 듯한 인물이 그렇게 답하는 것도 들렸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아카아시가 걷던 그 앞쪽, 모퉁이를 하나 끼고 도는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는 새에 그들의 대화를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이번에도 내가 있으니까 켄마가 하루 빨리 네코마에 적응하도록 도와줄게.”
“……응.”
“아아- 빨리 신입생들이 부활동 정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는 걸. 켄마가 어디로 도망 못 가게 꽉 붙들어매고 있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쿠로랑 같은 부활동 할 거니까.”
쿠로라 불린 이의 언행은 제법 오해의 소지가 다분해 보였으나, 엄연히 다른 부활동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모양이라고 아카아시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담백한 성격의 아카아시는 대화를 듣고 오해 없이 이해하는데에 탁월했다. 그래서 보쿠토 때에도 오해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조금 더 참아, 쿠로. 그렇게 덧붙이는 켄마라 불린 이의 말에 쿠로라 칭해지는 이가 끄응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대화를 들으며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사이가 좋네. 대화 양상으로 보자니 서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소꿉친구인가?
“켄마가 우리쪽에 오면 편할거야. 모두가 같으니까 말이야. 나도 포함해서.”
“나는 조금만 서 있어도 금방 피곤해지니까.”
“그래그래. 보기와는 다르게 켄마의 경우는 참 피곤하단 말이지-”
무엇에 대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고는 하지 못했다. 왜인지 아카아시는 누군지 모르는 둘의 대화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아카아시는 조금 더 집중하며 대화를 듣고자 했다. 조금의 침묵 후에 켄마라 칭해진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러운 성격인 듯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쿠로를 만났던 건 다행이었어. 나랑 같았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구, 켄-마아. 얼마 없는 내 이해자였어 켄마는.”
“응, 나도. 쿠로가 내 이해자여서 좋았어.”
이해자? 아카아시는 뜬금없이 튀어나온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의문을 띄웠다. 그 탓에 아카아시의 궁금증이 조금 증가했다. 무엇에 대한 이해자라는 뜻일까. 앞 뒤 대화 상황으로 그것에 대해 알기에는 지금의 대화에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리고 대화도 그쯤에서 끝났다.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며 두 사람이 반으로 돌아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아카아시도 서둘러 남아있던 심부름을 마저 끝내기로 하고는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심부름을 끝내고 후쿠로다니로 다시 되돌아온 아카아시였다.
이틀 전에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카아시는 아직 눈치채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상황은 그 다음날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세이죠였다.
다시 심부름을 이유로 또 다른 타교인 아오바죠사이, 통칭 세이죠에 오게 된 아카아시는 이러다 카라스노까지 전부 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세이죠에 들어섰다. 이번에도 심부름을 이유로 쉽게 들어온 아카아시는 이번에는 한 눈 팔지 않고 재빨리 심부름을 끝내고 나오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교무실을 돌던 와중이었다. 심부름을 하고 있던 아카아시를 발견한 한 선생님이 곧 심부름을 끝내려는 아카아시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일단 타교이긴 하나 선생님이 부르신거니 아카아시는 별 의문점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을 부른 선생님에게로 다가갔다.
“타교생에게 시키기에는 그렇지만, 나름 경험이 될테니까.”
그렇게 첫 운을 띄운 그 선생님은 작은 심부름을 하나 더 아카아시에게 시켰다. 이번에도 어려운 일은 아니고 별달리 거부할만한 이유가 없었던 아카아시는 겸사겸사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그렇게 아카아시가 향한 곳은 2학년의 한 교실이었다.
타교생이라 세이죠의 교실에 들어가기가 멋쩍다는 것을 교실 앞에 오고서야 깨달은 아카아시는 가만히 머리를 짚었다. 그렇게 아카아시가 서 있은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교실 안이 조금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예고없이 벌컥 앞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오려다 문 앞의 아카아시를 발견했다.
잠시 시선이 맞았던 세이죠의 선배는-일단 2학년이니까- 아카아시를 훑어보다 곧 후쿠로다니 학생이라는 것을 알아본 듯 싶었다. 교실 안에서 뭐라 떠드는 것을 돌아본 선배는 한숨을 내쉬고는 복도쪽으로 나오며 앞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교실 안의 소란이 조금 멀어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타교생이 심부름 하는 경우는 없는데 어쩌다 하게 됐냐?”
“교무실에 심부름 왔다가 어쩌다보니요.”
“그래? 지금 들고 있는 게 네가 심부름 하려던 거지? 줘. 보아하니 우리 반에 심부름 온 듯한데.”
아카아시는 조금 놀랐다. 자신이 자료를 들고 있기는 했지만 한 번에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아카아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선배에 아카아시는 별 말 없이 심부름 자료를 건네었다. 건네받은 자료를 한 번 본 선배의 시선이 아카아시를 향했다.
“1학년이냐?”
“아, 네.”
“후쿠로다니라.”
아카아시를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던 선배가 물었다. 그럼 너, 후쿠로다니의 보쿠토라고 알고 있냐? 순간 후쿠로다니가 아닌 타교의 선배에게서 보쿠토에 대한 물음이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아카아시는 조금 놀라서 바라보았다. 그런 긍정의 반응을 보인 아카아시에 선배는 웃었다.
“그 녀석이 뭐라고 찔러대든, 악의는 없을거다.”
“네?”
“그보다 그렇구나. 너구나.”
무언가 알았다는 듯이 아카아시를 바라봐오는 선배에 아카아시는 도리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상황을 알지 못해 그저 눈을 굴렸다. 뭐가 나라는 거지. 그런 아카아시를 보던 눈 앞의 선배가 손을 올려 아카아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것은 격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후쿠로다니 후배, 나중에 네 이름을 알려달라고?”
그 말을 끝으로 세이죠의 선배는 다시 앞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카아시는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영문을 알지 못해 눈을 굴렸다. 이름을 알려달라고? 나중에?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던 아카아시는 그렇게 심부름을 끝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후쿠로다니로 돌아왔다. 궁금증을 키운 채.
그리고 대망의 오늘. 그래 오늘.
시작은 당연하게도 보쿠토였다.
모든 수업을 끝마친 뒤의 청소 시간이었다. 아카아시도 청소를 하던 와중이었는데 어딘가를 가려고 했던 보쿠토가 그런 아카아시를 발견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오오? 아카아시잖아! 위에서 들려오는 나름 익숙한 보쿠토의 목소리에 아카아시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1층에 있는 아카아시에 비해 보쿠토는 2층의 창가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보쿠토상.”
“아카아시 안녕! 청소 중이야?”
“네. 그러는 보쿠토상도 청소 시간 아닌가요?”
“당연히 우리도 청소 시간이지! 그런데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빠졌어!”
“하아. 그러시구나.”
역시 아카아시 너무 담백해. 보쿠토가 처음 그 말을 했을 때처럼 웃었다. 아카아시, 도와줄까? 웃던 보쿠토가 그렇게 묻자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보며 말했다. 보쿠토상 일 있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잠깐 도와줄 시간 정도야 있지. 도와줄까? 왠지 보쿠토의 도와주겠다는 말이 약 올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아뇨. 괜찮아요.”
왠지 보쿠토상이 나서면 청소가 더 힘들어질 것 같거든요. 아카아시는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말을 했을 때 보쿠토에게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 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예상을 벗어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보쿠토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할 정도로 멋진 브레이커였다. 물론 반어법이다.
“에이.”
“도대체 어디에서 실망할 곳이 있는 건가요.”
보쿠토의 반응에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의 세계를 아카아시가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려운 듯 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니까.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어쩌다 정확하게 찔러온다. 그것을 아카아시는 삼일 전에 처음 만났을 때 파악해버렸다.
“아카아시.”
“네?”
학교 생활 재밌게 하고 있어? 문득 물어오는 보쿠토의 말에 빗질을 하던 손이 멈칫거리며 멈추었다. 응? 아카아시이- 그래. 딱 지금처럼 말이다. 재촉해오는 한 층 높은 곳에 있는 보쿠토를 아카아시는 어딘가 멍한 느낌으로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왜 자꾸. 아카아시는 시선을 땅으로 내리며 답했다.
“다른 아이들하고 같다고 생각해요.”
“흐음? 다른 아이들 말이지.”
“…….”
“있지, 아카아시는 말이야.”
아카아시의 대답에 눈을 굴리던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딘지 모르게 혼자 사는 것 같단 말이지.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찔리는 곳이 있는 탓에 침묵했다. 아니아니,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가만히 생각했다. 오해는 하지 않아요.
“그냥, 아카아시는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말해본 거니까.”
“…….”
그거 힘들다구?
보쿠토가 그렇게 말한 순간 아카아시가 가지고 다니던 종이 하나가 생각났다. 보쿠토와의 첫 만남에서 남겨두고간 그 종이. 아카아시의 생각이었지만 두번째로 발견했던 글은 아마 지금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보쿠토는 첫 만남부터 확실하게 무언가를 건들여오고 있었다.
“별로 만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하기는 때가 아닌 걸 아는데.”
“?”
“뭐라고 해야 하나. 아카아시는.”
지금 이 자리에 제대로 서 있는거야?
보쿠토의 물음에 아카아시는 무언가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정말 보쿠토는 이상하다.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데 보쿠토는 마치 아카아시의 마음을 전부 눈치챈 듯이 사정없이 찔러들어왔다. 제대로 서 있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아카아시는 답할 말이 없었다.
아카아시 자신도 잘 모르니까.
“현실감 별로 없지 않아? 붕 떠있는 감각이지?”
“그건….”
“솔직히 나는 아카아시가 어떤 상황인지 몰라. 이제 겨우 몇 번밖에 만나지 않았는 걸.”
“…….”
“그래서 나는 그런 아카아시가 궁금해.”
어떤 아이인지 말이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후배로서가 아니라 아카아시라는 사람 그 자체로 궁금하다는 얘기.
이어지는 보쿠토의 말에 문득 시선을 들어 바라보면 어렵지 않게 마주치는 시선. 어딘지 아카아시를 몰아붙이려는 듯 해보였던 보쿠토였으나 보쿠토는 창틀에 팔을 걸친 채로 한 손을 턱에 괴면서 아카아시를 보고 있었다. 웃으면서.
“어…….”
마주친 시선에 아카아시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슬그머니 다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보쿠토는 방금 전의 자세로 계속 아카아시를 보고 있었다. 웃는 얼굴. 그리고 바라봐오는 시선 속의- 왜인지 아카아시는 얼굴에 슬쩍 열이 몰리는 느낌을 받았다.
보쿠토는 명백하게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진심으로 아카아시가 마음에 든 듯했다. 자신에게로 건네지는 생소한 호의에 아카아시의 무언가가 자극받았다. 아카아시는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생소하게 느껴지는 감각이었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간질간질거리는 감각. 이건 쑥스러움이려나.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보이는 아카아시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핥기식으로 보이는 면모였다. 아카아시는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카아시는 본래 감정이 무딘 아이였다.
그것을 아카아시도 알고 있었지만 자라면서 이미 그렇게 형성되어버린 인격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을 지긋이 관찰했던 적이 있다.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아이들의 감정변화, 그것을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카아시는 겉으로 변해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소년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담백하긴 했지만 제대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모습이었던 것은 가짜였다.
진짜 아카아시 케이지는, 생각보다도 더 감정에 무뎠고, 그 탓에 감정변화도 지극히 적었다. 그렇지만 감정이라는 게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느끼는 감정을 정의 내리지 않았다. 가짜는 곧 부서져버렸다.
한 경험을 계기로, 완전히.
그 경험에서 느낀 감정을 아카아시는 알고 있었지만, 굳이 정의내려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쓸쓸했고, 그리고 지독히도 추웠다는 것만 기억했다.
가짜가 부서진 아카아시는 진짜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가짜로서 내보였던 감정들까지 사라진 건 아니어서 나름 사람답게 살아왔다, 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밖에 만나지 않은 이 한 살 많은 선배인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를 알아보았다.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제 생각은 전부 정리됐으려나?”
“…전에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요.”
“뭔데?”
“어떻게 아는 거예요?”
아카아시의 어이없는 감정이 전해져오는 듯해서 보쿠토는 소리내서 웃었다. 아하하. 웃지 말고요. 바로 들어오는 태클에 보쿠토는 정말 즐거운 듯 더 웃었다. 보쿠토가 웃으면 웃을수록 왠지 아카아시의 표정이 굳어져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말 티가 안 나네- 보쿠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감이야, 감!”
“하?”
“아하하, 내가 장담하는 것도 뭐한데, 나는 감이 무척! 좋거든. 뭐 나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녀석들이 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하도 그렇게 듣다보니 나도 이제는 그런가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어지는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가 눈을 깜박거렸다. 다른 녀석들? 저번에 말했지? <고민상담해결소>라고, 특이한 녀석들만 모여있는 곳이야. 보쿠토상 말고 더 있다고요?
“그거 무슨 뜻인데?”
“특이한 사람들이 더 있다는 것에 놀란거예요.”
“그치만 아카아시 정말 티 안난다. 주위의 분위기로 얼추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분위기요?”
“어엉. 뭐 눈치채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가 움찔했다. 하지만 곧 진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보쿠토가 거기까지 알 리는 없다는 것을 아카아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감인지 뭔지, 보쿠토가 느끼는 게 생각보다도 넓은 편이라는 것에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보았다. 그리고 생각났다.
그런데 보쿠토상. 왜?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시간 꽤 지났는데. 어엉? 아카아시의 말에 주머니에 넣어놓은 듯했던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시간을 확인한 보쿠토가 으어어억! 이라는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늦었다아! 아카아시, 오늘은 이만 간다! 또 볼 수 있으면 또 보자!
태풍처럼 휘몰아치며 가버리는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상은 피곤한 사람이구나. 보쿠토와 대화하느라 미뤄지던 청소를 마저 하는 아카아시였다. 나뭇잎들을 한 곳에 모으고 불을 붙여 소각했다. 재는 바람에 날아가 거름이 되겠지.
그게 오늘의 첫번째 상황이었다. 이때까지도 아카아시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상황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에게 찾아왔다. 아카아시가 직접 <고민상담해결소>에 오게 한 계기. 그 계기. 청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카아시는 교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찍이서 발견해버렸던 것이다.
오이카와를.
아카아시는 집으로 가기 위해 교문쪽으로 가던 것도 잊고 오이카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이카와는 아직 교문을 나서지 못한 채 여학생들-심지어 타교 여학생들도 있었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아카아시가 오이카와에게 시선이 향한 것은 오이카와 주변의 여학생들 때문이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처음으로 경악했다. 뭐야 저게.
오이카와 주변의 여학생들도, 심지어 오이카와도 모르는 듯 싶었다. 아카아시는 그게 유령임을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저건 비정상이었다. 지금까지 아카아시가 유령들을 보면서 저 정도의 유령의 군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저 상황은 말도 안 된다.
아카아시의 눈에는 오이카와 주변에 모여있는 수많은 유령들의 군집이 보였다.
저러고도 멀쩡할 수 있단 말이야? 아카아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눈 앞의 상황을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숙이며 몸을 떨었다. 그 순간 그런 아카아시를 향해 오이카와의 시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카아시는 그것을 모른 채 고민에 빠졌다.
“미안한데 이제 가봐야해서. 고마워, 과자 잘 먹을게-”
“가는 거예요, 오이카와상?”
“응. 소꿉친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기다리게 만드는 건 미안하거든.”
그럼 모두 조심히 들어가야 해- 여학생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해주고는 왜인지 아카아시쪽을 향해 다가오는 오이카와였다. 들려온 대화 소리에 시선을 들었던 아카아시는 점차 다가오는 오이카와가 자신을 보고는 생글 웃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웃는 게 굉장히 순해보이는 사람이었다.
“안-녕.”
보쿠토의 후배 군? 볼 일이 없다는 듯이 가볍게 말한 오이카와는 그대로 아카아시를 지나쳐갔다. 물론 뒤이어지는 말은 그렇지 못했지만. 오이카와는 그대로 지나쳐버린 아카아시를 흘겨보았다. 흐음, 그렇구나 그렇구나. 오이카와가 걸음을 떼며 입꼬리를 올려 빙그레 웃었다.
오이카와의 말에 잠시동안 쨍하니 굳어있던 아카아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오이카와가 저만치 걸어가버린 뒤였다. 여전히 오이카와의 주위에는 유령이 가득했다. 아카아시는 교문쪽에 시선을 주고는 오이카와가 걸어간 방향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가 아까까지의 이야기였다. 아카아시는 눈 앞의 상황으로 시선을 돌렸다. 웃고 있는 오이카와가 아카아시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아카아시와 나름 면면이 있는 이들이 두엇. 그리고 아직 누군지 알지 못하는 한 명까지. 아카아시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오이카와의 농간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한숨 쉴 필요 없다구, 아카아시군?”
“차라리 성만 불러주시죠, 보쿠토상처럼요.”
“흐음, 정 그렇다면야.”
그럼 보쿠토를 제외하고는 일단 각자 소개하지 않았지? 소개부터 할까. 오이카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오이카와를 아카아시가 말렸다. 보쿠토상은 알지만 다들 저를 모르시니까 저부터 할게요. 그런데 오이카와상이었죠? 제 성은 어떻게 아는 건가요. 응? 그건 오이카와상의 비밀이야-
“보쿠토상이 말한 건가요.”
“뭐?! 나도 말한 적 없다구 아카아시!”
“맞아맞아. 봇군은 말한 적 없는 걸. 어디까지나 내가 알아낸거야.”
죄 없는 봇군 괴롭히지 말아줘? 봇군이라고 부르지 마! 어라어라, 싫었어? 그럼 어떻게 불러줄까? 필요없어! 예고 없이 시작되는 짧은 만담에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였다. 보쿠토의 반응에 오이카와가 웃었다. 그렇게 오이카와가 웃는데 그런 오이카와의 등에 철퇴가 작렬했다. 으악!
“아프다구, 이와쨩! 왜 때리는 거야!”
“징징거리지 말고 제대로 못 하냐!”
“쳇쳇. 나쁜 이와쨩.”
얻어맞은 등을 문지르며 툴툴거리는 오이카와였다. 조금의 소란 후 상황이 진정되는 듯 싶자 아카아시가 소개를 시작했다. 아카아시 케이지. 알다시피 후쿠로다니 1학년입니다. 정중한 소개에 잠시 침묵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그리고 오이카와가 두어번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난 오이카와 토오루고 세이죠 2학년이야. 이와쨩하고는 소꿉친구기도 하고.”
“이와이즈미 하지메. 세이죠 2학년.”
“흐음. 다음은 나지? 쿠로오 테츠로. 네코마 2학년.”
오이카와에 이와이즈미. 그리고 이어지는 쿠로오의 소개에서 아카아시는 기묘함을 느꼈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인데. 네코마라. 쿠로오 테츠로. 눈을 굴리며 생각을 하던 아카아시가 순간 쿠로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카아시의 시선을 받은 쿠로오는 의문을 표했다.
“왜?”
“혹시 쿠로 라고 불리던?”
“흠? 그걸 어떻게 알았어? 켄마의 친구?”
아니지, 켄마의 친구라면 내가 다 알고 있는 걸. 쿠로오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헀다. 그에 아카아시는 확신했다. 아카아시가 네코마에 가서 들었던 대화를 나누던 두 명 중 한 명이 바로 이 쿠로오 테츠로였다. 게다가 이와이즈미는 세이죠의 심부름으로 만났었고 말이다.
“뭐, 다른 건 됐고.“
“?”
“있지- 아카아시도 ‘특이’를 가지고 있지?”
“!?”
난데없이 건네지는 오이카와의 말에 아카아시는 굳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카아시의 반응에 오이카와가 웃었다. 정답이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카아시가 눈을 굴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왜인지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놀람이나 동요의 감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에 아카아시가 의문을 가질 때 폭탄이 터졌다.
“놀랄 거 하나도 없어. 왜냐면 우리들도 ‘특이’를 가진 능력자니까.”
오이카와가 아카아시를 보며 웃었다. 이와이즈미도, 쿠로오도, 그리고 보쿠토도 아카아시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이 그렇게 아카아시를 보고 있었다. 아카아시의 시선이 오이카와에게서 이와이즈미, 쿠로오, 그리고 보쿠토에게 가 닿았다.
아카아시와 시선이 맞은 보쿠토는 그냥 웃어주었다.
“우리랑 같이 하지 않을래, 아카아시?”
건네진 보쿠토의 물음에 아카아시는 망설이는 듯 고개를 숙였다. 보쿠토는 웃으면서 아카아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뒤 아카아시의 손이 슬쩍 보쿠토의 손 위에 놓여졌다. 그 손을 잡아당긴 보쿠토는 얼떨결에 끌려온 아카아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왔어!
“네.”
그 모습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아카아시를 보던 오이카와가 웃으며 외쳤다. 이와쨩, 핫초코!
그렇게 아카아시가 합류하고 삼일 후, 신입생의 부활동 신청 기간이 되자마자 쿠로오가 켄마를 끌고 들어옴으로서 또 1년이 시작되었다.